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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용산과 나의 집]상상하세요, 용산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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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용산국민법정    
작성일 2009년 09월 16일 02시 30분 41초
용산과 나의 집 (1)
상상하세요, 용산을


- 발칙한(서울상경열혈고딩)


자칭 축복받은 고등학생입니다. 저는 혼자 사는데, 부산에 계신 부모님이 매달 방세를 대주세요. 상근하시는 사감선생님의 주된 업무가 벌레잡기인, 이름만 기숙사인 사설 기숙사에 살거든요. 서울에서 부모님과 멀리 떨어져 산다는 건 엄청나게 많은 의미를 가지고 있어요. 막차만 타면 밤에 아무리 늦게 들어가도 상관없고, 아버님이 한나라당 공천을 받으시려 하건 말건, 몰래 진보신당에 가입하고 이틀 동안 당원한마당에 다녀올 수도 있습니다. 한번 본 뒤 눈에서 아른거리는 파란색 원피스가 있으면 눈 질끈 감고서 며칠 굶고 버스 대신 두 다리를 애용해 모은 돈으로 원피스를 사는 선택을 할 수도 있지요.
어머니께서 대치동에 집 얻어서 올라오시겠다고 했을 때, 기숙사에서의 삶의 모습들을 대부분 유지할 수 없을 것 같아서 쌍수 들고 반대했습니다. 부산 집, 대치동의 집, 사설 기숙사 중 어느 곳에 사느냐에 따라 지금 당장은 물론 평생의 저의 모습이 달라지지 않을까 싶어서입니다. 공간이 사람을 결정지으니까요.

올해 봄, 다양한 이유들로 인해 고등학교를 자퇴하고 싶다고 부모님께 말씀드렸더니, 그럼 방세를 댈 이유가 없으니 부산으로 내려오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 때 자신이 ‘집’이라고 이름 짓고 다양한 관계들을 맺으며 살아온 곳에서 더 이상 살지 못한다는 생각이 주는 불안감을 처음으로 느낀 것 같아요. 여전히 저는 고등학생의 신분을 유지하고 있습니다만, 그때 느낀 떨림은 최근 들어 ‘용산’을 다시 접했을 때 저에게 작지만 중요한 상상력을 제공해 주었습니다.

사십 년 뒤, 지금 다니고 있는 학교 앞의 나지막한 건물 1층에서 작은 문방구를 하고 있는 따뜻한 상상을 해봅니다. 가게 뒤에는 남편과 저의 아담한 생활공간이 있다고 치지요. 동네가 행정구역상 서울 시내이긴 하지만, 워낙 외곽에 위치해 30년 정도 열심히 단체에서 상근하다 보니 보증금과 월세를 낼 정도의 돈을 통장에 모아놓았다고 하죠. 친절한 문방구 아줌마가 되겠습니다. 등교하는 아이들 손에 준비물을 들려주는 아침들. 생각만으로도 저절로 입가에 웃음이 그려지는, 그런 소박한 행복들입니다.
그런데 깔끔하게 면도를 한 아저씨가 시장에 당선되더니 급기야 지역구 국회의원들도 ‘재개발’을 공약으로 내걸고 여의도에 발을 들여놓습니다. 제가 41년 6개월동안 살아온 동네를 말끔하게 정비해주시겠다며, 평당 30만원의 보상금을 줄 테니 10월까지 나가달라는군요. 매일 아침 찾아오는 이웃들과 꼬마 단골들이, 등교 시간의 왁자지껄함과 방과 후의 기분 좋은 고요가 그저 몇 자리의 숫자로 계산되는 것에도 화가 나겠지만, 그 액수가 나의 평온하고 평범한 삶조차 유지할 수 없는 것이라면, 선택의 여지가 있기는 한가요?
다른 선택의 여지조차 없기에 살기위해 투쟁을 택했는데, 그 투쟁이 언론과 용역업체, 검?경찰, 구청장, 시장, 나아가 대통령까지를 포함한 ‘가진 자’들과의 계란으로 바위치기 격 싸움이라면. ‘철거민’이라는 신분이 자신에게는 평생 해당사항이 없을 것이라고 믿고 있는(믿고 싶은!) 시민들에게 한 마디 격려조차 받지 못하는 상황에 놓인다면. 그저 생존을 위해 싸우다가 내몰릴 대로 내몰린 가운데 함께 하는 이들, 혹은 이웃과 가족이 다치거나 억울한 죽음에 이르기까지 했는데, 그 진실이 ‘보도지침’ 따위를 통해 또 다른 살인들로 은폐된다면.

저는 아직 전세금 한 번 내본 적 없는 고딩이라 뭘 잘 모릅니다. 용산참사가 발생했을 때에는 지금보다도 아는 게 없었습니다. 다만 누군가가 자기 집에서 쫓겨나지 않기 위해 싸우다 길 곳곳에 살얼음이 끼도록 추운 1월에 화염 속에서 돌아가셨다는 비참한 상황. 그게 너무 슬프고, 역설적이고, 화가 났으며, ‘보도지침’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믿기지가 않아서 한참을 멍하게 있었습니다. 다만 당시에는 그 일이 제게는 평생 일어나지 않을 일처럼 생각되었습니다. 마찬가지의 이유로 많은 사람들이 누군가가 끼워놓은 색안경 때문에 제대로 공감하거나 행동하지 못하고 있는 것 아닐까요. 당신도 이제까지 자신은 ‘절대로’ 철거민이 될 수 없다고 생각해 오셨다면, 색안경을 벗어던지고 상상하세요, 용산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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