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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두리번두리번 5-1]꿀물인가 독물인가-재개발에 대한 슬픈 이야기
번호 38 분류   조회/추천 2067  /  326
글쓴이 준비위    
작성일 2009년 10월 14일 17시 43분 29초

꿀물인가 독물인가

재개발에 대한 슬픈 이야기

임석재(이화여자대학교 건축학과 교수)

 

 

나이가 좀 든 세대는 어렸을 때 손바닥 위에 흙을 덮고 누른 다음 손을 빼서 터널처럼 생긴 집을 만들며 논 기억이 있을 것이다. 이때 부르는 노래가 있다. “두껍아 두껍아 헌집 줄게 새집 다오”이다. 독재 권력과 그에 기생하던 극소수를 빼고 너도나도 다 가난할 때 이 노래는 분명 미래에 대한 희망이자 바람이었다.

어린이 노래 속에 시대상이 담긴다는 무서운 진리는 이번에도 예외는 아니어서 1970년대 이후 우리의 근대사는 이 노래 가사를 실현하는 과정이었다. 분명 우리의 근대성 프로젝트에서 집은 일등공신이었다. 판자로 얽어 비새고 쥐가 들끓는 집을 헐고 새 집을 준다는 데야 누가 뭐라 하겠는가. 헌 집 부수고 새 집 짓고, 그걸 다시 사고 판 돈으로 우리는 자식들 일류대학도 보냈고 3000cc 자동차도 샀고 유럽여행도 갔다 왔다.

집이 아니면 무슨 재주로 그렇게 빠른 시기에 이렇게 많은 국민들이 잘 살게 되었을까. 집은 잠자리만 주는 줄 알았는데 돈, 그것도 우리가 주체한 능력을 넘어선 큰돈을 주기까지 하니 세상에 이렇게 고마울 수가 있을까.

그러나 이것이 과연 그렇게 자랑스럽고 기뻐하기만 할 일일까. 근대성 프로젝트는 정량의 문제가 아니라 정성(定性)의 문제이다. 우리는 왜 국민소득 4만 불이 되어야 하며 왜 선진국이 되어야 하는가. 우리는 그 숫자 자체에 너무 집착하는 것은 아닌가. 근대성 프로젝트의 진정한 완성은 정량적 성취 이면에 숨은 정성적 문제의 허와 실을 냉철하게 찾아내 끊임없이 반성하고 고치는 과정을 힘들게 거친 다음에 비로소 얻어진다.

정량에 집착해서 벌어진 황당한 폐해를 비록 완벽하지는 않더라도 최소화하는 과정 없이는 절대 진정한 근대성 프로젝트를 이룰 수 없다. 서구 선진국들은 이 과정을 거쳤다. 이것이 숫자만으로는 맞먹을 수 없는 진짜 선진국의 요체이다. 이것은 압축근대화의 속도전이 좋은 건지 나쁜 건지부터 엄밀히 따져보아야 할 시대가 되었다는 말과 동의어이다.

 

참으로 억울한 사람들

 

결국 용산참사가 벌어졌다. 나는 이미 10년도 더 전부터 집 가지고 장난치다간 비참한 최후를 맞을 것이라고 여러 차례 떠들었다. 나는 당연히 집을 투기의 대상으로 몰고 가는 집단이 그 최후의 대상이 될 것이라 생각했었는데 내가 많이 부족해서인지 당해서는 안 될, 당할 이유가 하나도 없는 사람들이 당하는 정 반대의 결과가 나타났다.

미분양과 부동산 하락으로 따끔한 교훈을 얻는 사람이 아주 없지는 않겠지만 정작 일을 저지른 장본인들은 공사판 출신 대통령의 엄호 속에 따뜻하고 과분한 보살핌을 듬뿍 받는 반면, 아아 참으로 억울한 사람들(여기에는 물론 숨진 경찰관도 포함된다)이 그 폐해를 온통 뒤집어쓰고 말았다.

용산참사가 나고 혹시나 하는 마음에 소위 말하는 보수신문이란 것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좌우나 피아, 가족과 민족 등의 편 가름을 떠나 인류 보편의 공분이란 것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안 보느니만 못하게 되었다. 세입자들의 문제 자체는 얘기를 안 하지 않았지만 결과는 그 요구를 다 들어주다간 결국 입주자, 즉 전체 조합원이 내야 할 분담금만 높아져서 문제가 더 크다는 게 결론이었다. 내가 내 스스로를 보건대 굳이 구별하자면 나는 우파에 속하지만 그런 내가 볼 때 이건 제일 중요한 핵심이 빠진 결론이었다. 재개발을 통해서 시행사와 건설회사가 챙겨가는 이윤이 과연 적절한 것인지, 더 근본적으로 이들이 과연 합법적으로 그 이윤을 챙겨가는지에 대해서 따져보는 것이 이 문제의 핵심이다.

 

악랄한 착취구조

 

지금 우리나라에서 집을 끼고 벌어지는 악랄한 착취구조는 이를테면 한국전쟁을 일으킨 김일성이 나쁜 것과 똑같은 수준의 인류 보편적 폐해에 해당된다. 우파인 내가 볼 때 김일성이 나쁜 것과 똑같이 우파인 내가 볼 때 용산참사는 역시 잘못된 것이다. 거기에다 나는 건축계 사람이기 때문에 우리나라의 건설회사가 재개발에서 어떤 방식으로 얼마만큼의 이윤을 챙기는지 잘 안다. 지금도 대학동기와 선후배를 포함해서 내가 아는 가장 많은 수의 건축계 사람들이 건설회사가 마련해주는 돈으로 자식들 공부도 시키고 가정을 꾸리고 먹고살고 있다. 여기에다 대고 나는 지금 너무도 가슴 아픈 얘기를 하고 있는 것 아닌가. 내 가슴을 후벼 파는 것 같다. 이건 좌우의 문제도 아니고, 내부고발의 문제도 아니고, 양심선언의 문제도 아니다. 그냥 인류보편의 기준에서 보았을 때 옳고 그름의 상식-몰상식의 문제이다(단순한 몰상식의 문제는 아니겠지만 나는 이 이상 더 서글픈 단어를 알지 못한다).

대통령이 다시는 같은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대책이 필요하다고 말하자 정부는 기다렸다는 듯 하루 만에 대책이란 걸 내놨다. 기존에 떠돌아다니던 것 중에 건설회사에 피해가 안 갈 것만 골라서 짜깁기한 것들이다. 이 문제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10분 정도면 만들어낼 수 있는 수준이다. 이래서 진정성 얘기가 나오는 것이다. 아직은 이 문제에 대해서 세부 규정 등 기술적 문제를 논할 단계는 아니라고 본다.

세상일에는 순서라는 것이 있다. 법에도 모법이 정해져야 그에 따라 세부 법률과 시행령이 마련될 수 있듯이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재개발이라는 엄청난 사안에 대해 모법에 해당되는 차원의 큰 방향에 대한 동의에 도달하는 일이다. 우리는 단 한 번도 이런 동의에 도달한 적이 없다. 아니, 동의는 너무 큰 얘기이고 머리 맞대고 앉아 본적조차 없다. 그런 상태에서 40년 넘게, 아마도 우리가 그동안 축적한 부의 절반 이상을 담당했을 그런 엄청난 사업을 수 백 수 천 건 시행해왔다. 이건 시행이 아니라 숫제 저질렀다는 표현이 더 적합할 것이다.

모법도 만들어내지 못한 상태에서 40년 동안 수 천 만 건의 법률 판결을 내린 것과 같은 이치이다.

여러 이해당사자들 사이에 동의가 필수이다. 관(官)은 제쳐두고라도 적어도 민 쪽에서만도 건물주, 건설회사, 세입자의 세 당사자가 있다. 동의는 다수결과 다르다. 집 문제는 기본적 인권에 속하는 문제이기 때문에 다수결이 아닌 동의가 전제되어야 한다. 그러나 지금 우리의 재개발 방식은 건설회사의 이익 하나에 모든 권한이 다 넘어가 있고 건물주는 재산증식이라는 미끼에 꿰어 그 뒤꽁무니를 잡고 신기해하며 동참하고 있는 격이다. 다수의 횡포란 이런 때 쓰는 말이다. 

 

80%와 17%, 숫자의 횡포

 

지금 재개발은 민주주의의 원칙을 내세워 80%의 동의율이 있을 때에만 시행할 수 있게 되어 있다. 우리는 숫자의 횡포에 또 한 번 빠져있다. 재개발을 해야만 3만 달러로 가고 4만 달러로 가서 선진국이 될 수 있다는 숫자의 횡포와 사실은 동의어이다. 80%의 동의율이 왜 숫자의 횡포인가. 그것은 원주민의 재 정착율이 17%라는 사실과 다시 동의어이다. 80%와 17%의 간극을 어떻게 이해하고 설명해야 하는 것일까. 그것이 바로 이번에 참사로 귀결된 세입자의 권리 문제이다.

재개발이 벌어지는 지역에 실제 사는 사람들 중 60~70%는 집주인이 아니라 세입자인데 이들은 재개발에 대해 찬반의 권리가 없기 때문에 벌어지는 현상이다. 숫자 조작이란 참으로 묘한 것이어서, 이번 용산참사에서도 보듯 60~70%의 세입자들 가운데 억울하게 피해를 입는 사람은 마치 끝까지 남아서 목숨 내던지며 싸우는 극소수인 것으로 몰고 가고 있다. 이 정도의 소수라면 나머지 99.9%에 달하는 대대다수의 이익을 위해 조금 피해를 봐도 괜찮지 않느냐는, 절대 있어서는 안 되는 그런 방향으로의 동의만 난무하고 있다(여기에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것이 조국 근대화의 필요성이다).

그러나 정말 끝까지 남아 결사항전 하는 그 극소수만이 억울한 피해자일까. 현재의 재개발 방식 아래에서는 60~70%에 달하는 세입자 전부가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모두 억울한 피해자이다. 모두 착해 빠져서, 아니면 비겁해서, 그도 저도 아니면 조국 근대화에 걸림돌이 되기 싫어서, 피눈물 삼키며 자식들 손잡고 쓸쓸히 뜰 뿐이다. 소란을 부리지 않으니 이들은 뉴스거리조차 되지 못한다. 용기라도 있어서, 아니면 건설회사와 보수신문과 공사판 출신 대통령의 표현대로 극악무도한 폭도라서 길바닥에 드러누워 소리나 질러야 왜 그러냐고 한 번 쳐다나 봐주는 세상이다.

이것이 숫자의 횡포라는 것이다. 우리는 이것을 고치지 못하는 한 절대 선진국에 도달할 수 없다. 여기서 끝이 아니다. 이런 어마어마한 추악한 숨은 진실에 더해 더 근본적인 질문을 하나 더 해야 한다. 백 만보 양보해서 설사 억울한 피해자가 악다구니로 버티는 극소수의 사람들뿐이라고 한들, 그 사람들은 과연 99.9%의 나머지 대대다수를 위해서 피해를 입어도 되는 것일까. 내가 아는 민주주의에서는 절대 그럴 수 없다. 이것은 다수결의 문제가 아니다. 다수결은 도깨비 방망이나 만병통치약이 아니며 전가의 보검도 아니다. 다수결보다 더 고결한 민주주의 원칙은 싫다면 하지 말아야 하는 것이다. 더구나 30년 40년을 살아온 삶의 터전을 놓고 벌어지는 문제이다.

10원 한 장이라도 싫다면 빼앗을 수 없는데 하물며 한 가족의 평생을 송두리째 놓고 우리는 너무 추악한 도박판을 벌이고 있다. 이것은 다수결로 결정할 수도, 결정해서도 안 되는 인권의 문제이다. 반장 선거도 아니고, 자장면을 먹을지 부대찌개를 먹을지 결정하는 것도 아니다. 인권의 문제이다. 집은 생명을 보존하고 옷을 입고 밥을 먹는 것과 동일한 격의 인권의 문제이다.

 

세입자는 아무 권리가 없다?

 

세입자는 과연 아무 권리를 주장할 수 없는 것일까. 물론 현행법으로는 그렇다. 그러나 세상에 해석 없이 100% 그대로 적용될 수 있는 법이 과연 무엇이 있는가.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그 여신은 왜 엄숙한 자세로 저울을 들고 있을까. 세입자는 과연 아무 권리가 없을까. 권리가 없다면 어느 범위까지 없는 것일까. 집주인이 전세금 안 주고 나가라면 그냥 나갈 정도로까지 권리가 없을까. 그렇다면 우리가 그토록 흠모하며 닮고 싶어 하고 따라잡고 싶어 하는 여러 선진국들에서는 왜 이 문제에 소위 말하는 공공성 개념을 도입하는 것일까. 그 나라들도 법 조항만 보면 세입자는 재개발에 찬반으로 개입할 권리는 없다. 그런데 그 나라들은 왜 반대하는 세입자를 태워죽이지 않고 오히려 공공성 개념을 도입하는 것일까.

60~70%에 달하는 세입자가 30~40년 동안 터를 일구어 살고 장사를 하지 않았다면 과연 ‘시장원리에 입각해, 민주적인 방식에 의해, 민간주도로’ 이 엄청난 사업을 그렇게 해치워댈 재원이 나왔을까. 동네라는 것이 있기에 그걸 밀고 아파트 단지를 세울 재원이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 동네를 구성하는 주민들은 동등한 권리를 갖는다. 그래서 선진국들이 재개발에 공공성 개념을 도입하는 것이다. 한 마디로 사람 사이의 문제로 이것을 정의하고 시행하겠다는 것이다. 우리처럼 돈 사이의 문제로 보지 않는다는 뜻이다. 왜 사람 사이의 문제를 돈에게 맡기는가. 그 결과는 너무 뻔하지 않은가.  

 

돈 놀이에 미쳐

 

내가 대학생 때 엉엉 울면서 읽었던 그 ‘난쏘공’, 세상의 불편한 진실을 최루탄과 화염병이 아닌 문학작품으로 처음 일깨워준 그 ‘난쏘공’을 쓴 조세희 작가가 말했듯이,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정말 집이 아니다. 집은 넘쳐난다. 부족하다 싶으면 일 년이면 수 십 만 채는 거뜬히 짓고도 남는다. 그런데도 왜 집 때문에 여섯 명의 황당한 죽음이 벌어져야 하고 앞으로도 비슷한 참사가 줄줄이 대기하고 있는가. 권리금이 문제인 모양이다. 세계 어느 나라에도 없는 문제란다. 맞는 말이다. 권리금은 내가 봐도 전근대적 잔재이다. 그렇다면 근대성 프로젝트를 그렇게 숨 가쁘게 진행하면서 왜 이런 황당한 전근대적 잔재를 함께 지울 생각을 하지 못했을까. 우리는 적어도 50년의 시간이 있었다. 그동안 단물 나오는 돈놀이에만 미쳐서 날뛰다가 이제 와서 권리금이라는 문제가 엉뚱한 방향으로 폐해를 만들어내고 있다.

권리금이 문제라면 재개발은 잠시 중단하고 권리금 문제부터 해결해야 한다. 경제관련 법부터 하나하나 다듬고 사회적으로도 권리금 없이 매매와 전매가 이루어지는 풍토를 만들어야 한다. 재개발은 그때 가서 해도 늦지 않다. 10년이 걸리면 10년을 기다려야 하고 20년이 걸리면 20년을 기다려야 한다. 용산개발은 그때 가서 해도 늦지 않다. 관광객은 나중에 받아도 된다. 지금 중요한 것은 관광객이 아니다. 남의 나라 관광객보다 우리 이웃의 문제, 더 근본적으로 인류 보편의 상식을 지켜야 하는 문제가 훨씬 더 화급하다. 그렇게 해서 재개발이 다 끝났을 때 구성원들이 모두 모여 막걸리라도 주고받으면서 수고했다며 웃으며 악수할 수 있을 때 관광객은 지금 예측하는 것보다 만 배는 더 올 것이다.

이렇게 우리 이웃을 태워죽이면서까지 저질러대는 재개발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렇게 해서 손에 넣는 돈이 과연 단 꿀물인가 쓴 독물인가. 예수는 왜 창녀를 만나고 나병 환자를 쓰다듬었을까. 부처는 왜 왕자로서 가진 것을 다 버렸을까.

 


 

 

* 이 글은 <공동선> 3/4월호에 실렸던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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