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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두리번 두리번 3-2] “차라리 저는 지금이 행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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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준비위    
작성일 2009년 09월 30일 13시 36분 18초

[두리번 두리번 3-2] “차라리 저는 지금이 행복합니다”

용산 4구역 철거민 노한나 씨 / 글 :   김순천 르포작가

 

 

“그동안 삶이 너무 외로웠다.”는 노한나(53)씨의 마음 속 말을 듣고 나는 그렇게 말을 해 준 그가 더없이 고마웠다. 우리는 정말 다들 외롭게 살고 있다. 나는 용산의 문제도 아, 우리는 처절히 외롭구나, 이 고백부터 출발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우리는 외로움이 어디서 왔는지, 어떻게 하면 치유될 수 있는지 천, 천, 히, 들여다보아야 한다.


노한나 씨는 거의 30여 년 동안 장사를 해왔던 분이다. 작고 단단한 몸에 눈빛이 선한 그를 나는 용산참사 현장인 남일당의 옆 건물, 호프집에서 촛불방송국으로 바뀐 ‘레아’에서 만났다. 소상인으로서 살아온 그는 패밀리마트 운영 등 많은 실패 끝에 마지막으로 용산 4구역에 ‘153 물고기’ 당구장을 차렸다. 그의 가게 바로 아래층은 이번 참사로 돌아가신 양회성 씨의 ‘삼호복집’이다. 노한나 씨의 가게도 철거대상이 되었다.


“날카로운 현실 위에 서 있어 절망 속에 있지만 차라리 지금이 행복합니다.”

그가 나에게 이런 말을 했을 때 나는 오히려 놀랐다. 어떻게 이런 절망적인 순간에 행복하다고 말할 수 있는가. 그가 고백했던 자신의 처절히 외로웠던 이야기를 듣고 나서야 나는 이해가 되었다.

그의 외로움은 장사하면서 자신이 만난 ‘대형자본’에서 비롯되었다. 자본들은 항상 전면적이고 총체적인데 그는 항상 고립되고 파편화되어 있었다. 아무리 성실히 일해도, 아무리 노력을 해도 개인의 힘만으로는 자신의 삶을 지켜낼 수가 없었다. 노한나 씨는 그들의 이익 앞에 철저히 파괴될 수밖에 없었다. 그 파편화되어 혼자 힘겹게 싸울 수밖에 없었던 상황이 그를 처절히 외롭게 만들었다. 철거민이 되어서도 그는 철거민들이 항상 외로운 싸움을 하는 것을 지켜보았다. 보통 평범한 사람들이 보통 평범한 사람들인 철거민들의 싸움을 불편해 해서다. 보통 사람들은 철거민과 자신의 삶을 분리하고 있었다. 모든 것이 분리, 분리, 분리되어 있었다.

용산참사가 나고 많은 사람들을 만나면서 고립되고 외로웠던 노한나 씨의 마음은 빛나기 시작했다. 많은 사람들과의 나눔이 노한나 씨를 기쁘고 행복하게 했다.


노동자도 아닌 단순히 빈민도 아닌 노한나 씨처럼 평범한 소상인으로 살아온 사람들이 자신의 존재를 깨달아 가는 것에 나는 우리시대 일반 사람들의 새로운 모습을 보았다. 그것은 숲에서 솟아나는 작은 샘물처럼 신선했다. 이것이 확산되면 ‘사회적 고통’을 어루만지고 상처를 이겨낼 수 있는 힘이 될 것이다. 보통 평범한 사람들의 삶의 질을 높이는 높은 의식과 나눔과 연대만이 그 자신을 지켜낼 것이라 믿는다.


1. 너무너무 외로웠는데 여기서는 외롭지 않아요

아, 저는 상상을 못 했어요. 참사 이후에 제가 세상의 전혀 다른 모습을 보게 되리라는 것을요. 1월 20일 아침에 특공대가 투입되고, 망루에 불이 붙어 사람들이 돌아가셨을 때는 절망을 느꼈어요. 세상의 끝을 본 거예요. 근데 그 이후로 이렇게 많이, 좋은 사람들이 찾아오고, 따뜻하게 마음을 나누워 주고, 자신들이 갖고 있는 재능들을 나눠주는 만남이 있다는 게 저에게는 놀라운 일이었어요. 많은 사람들이 우리들에게 지지를 보내고 있었어요. 쌀도 갖다 주고 김치도 갖다 주고. 어떤 분들은 글로, 어떤 분들은 노래로, 만화로 저희들을 도와주었어요. 아, 올바름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이 나라에도 많구나. 그동안 저는 너무너무 외로웠는데 이 속에서는 외롭지 않았어요.


저녁 7시쯤에 미사를 드리고 있으면 날이 어둑어둑 해지잖아요. 눈을 감고 있으면 가만히 바람이 지나가는 게 느껴져요. 그러면 따뜻하게 누군가 내 몸을 만져주고 있다는 느낌이 들어요. 전율이 느껴져요. 비록 길바닥에 앉아서 미사를 드리고 있지만 저는 평화를 느껴요. 예전에는 전도 그러면 전단지 나눠주는 그런 걸로 알았는데 이렇게 고통당한 사람 곁에 함께 있어주는 것, 평화로운 삶을 지켜주는 게 정말 참다운 신앙이고 전도라는 걸 깨달았어요. 날카로운 현실 위에 있고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고통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지만 차라리 저는 지금이 행복합니다. 이런 여러 만남을 통해 저는 내 안에 죽어 있던 자비로움과 측은한 마음을 느끼고 되찾았어요.


이제까지 저는 내 자신과 가족들을 위해 쉼 없이 일해 왔습니다. 일요일도 가게 문을 열어서 돈을 벌었어요. 교회 잠깐 갔다오고 가게 문 열어서 일하면 10만 원을 벌어요. 그거라도 벌어야 하기 때문에 문을 열었어요. 거의 20여 년 동안 저는 일하느라 휴가 한번 제대로 가보지 못했어요. 가족여행도 전혀 없었어요. 딱 한 번 아버지 칠순 때 제주도 여행을 간 것 외에는 여행을 간 기억이 없어요. 그것도 아버지가 언제 돌아가실지 모르니까 갔던 거예요. 현실에서 살아남기 위해 앞만 보고 일직선으로 살았어요. 남보다 앞서야 하고, 뒤처지지 않으려고 바동거리며 살았어요. 이제는 그렇게 안 살고 싶어요. 용산이 나를 변화 시켰어요.


2. 음반가게-이마트 같은 대형마트가 참 무섭다

저는 고등학교 졸업하고 대우실업에 들어갔어요. 거기서 돈을 벌면서 열심히 공부해서 시립대 야간을 갔어요. 남편을 그곳에서 만나서 결혼했습니다. 학생부부. 처음에는 지하방에서 월세로 살았어요. 남편이 공무원 되고 저도 열심히 일해서 3층으로 이사 갔는데 너무너무 좋더라구요. 그때는 지하방 벗어나는 게 꿈이었거든요. 또 36개월 동안 청약부금을 들어 일산에 33평 아파트를 마련했어요. 그 당시 가격이 7천2백만 원이었어요. 물론 Ñ처음마련하기 위해 대출처음받았는데 그때가 90년대 초였어요. 근데 남편이 IMF 당해서 주식을 6천만 원어치나 날려 버렸어요. 그래서 제가 할 수 없이 Ñ처음담보로 대출처음받아서 음반가게를 냈어요. 그때 음악처음참 많이 들었어요. 장사도 잘 됐어요. 지금은 인터넷에 음악이 깔려있으니까 카세트테이프가 사양길로 접어들었는데 그때는 그러지가 않았거든요. 새로운 음반이 나오면 가게에 태지가 신곡을 발표하면 2백 내지 3백 명씩 예약처음했어요. 그러면 저는 번호를 매겨서 예약권처음먼저 팔았어요. 그렇게 장사가 잘 됐는데 저희 가게 근처에 이마트가 들어온 거예요. 제가 카세트테이프를 아무리 싸게 들여와도 원가를 4천 원에 떼어 서 4천5백 원에 파는데 이마트에서는 3천9백 원에 파는 거예요. 아마트 들어온 지 불과 2년 만에 가게를 정리 할 수밖에 없었어요. 대형마트가 들어온다는 게 그렇게 무서운 겁니다.


IMF 때 주식으로 6천만 원 그리고 음반가게, 그것도 집 담보로 대출 받은 돈으로 차린 가게가 망하니 참 힘들었어요. 나에게 왜 이런 시련이 있는 걸까, 원망이 오더라구요. 정직하게 열심히 일해서 먹고 살려고 하는데 이런 일이 닥치니까 고통스러웠죠. 그런데 그것은 아무 것도 아니었어요.


3. 패밀리마트(1)-노예처럼 일만 했어요

남편 월급은 그 동안 빌린 돈 이자 갚기 바쁘고 어떻게든 먹고는 살아야 되니까 뭐라도 해야 했어요. 남편이 어떻게 알았는지 한남동에 있는 단국대 앞에 패밀리마트가 있는데 그걸 해 보자고 했어요. 그 전에는 몰랐는데 패밀리마트가 삼성 계열이더라구요, 보광이라고. 보증금 5천만 원에 월세 4백만 원씩 주었어요. 권리금도 몇 천만 원 주구요. 시설비는 자기네들이 다 설치해 주고 24개월 할부로 갚게 했어요. 들어갈 때는 너무 쉽고 달콤하게 해 놓고 나올 때는 발가벗겨서 빈털터리로 나오게 하는 게 패밀리마트였어요.


저는 빵 같은 것도 맛있는 걸로 팔고 싶은데 그 회사에서는 자기들이 만든 빵으로 하라고 하는 거예요. 이게 마찰이 됐어요. 그 회사에서 공장이 하루아침에 막 생겨요. 작은 중소기업에서 어떤 물건을 넣어서 잘 팔린다 그러면 그 회사를 사 버리는 거예요. 예전에 삼각김밥이 잘 팔렸거든요. 어느 날 생산하는 업체의 마크가 없어지더니 패밀리마트 마크가 찍혀서 들어오더라구요. 그 공장을 사버린 거예요. 그렇게 하면 자기들이 힘 안들이고 하루에 공장 하나씩 만들어 낼 수 있는 거예요.


가장 힘들게 했던 것이 날마다 그날 매출액 2백만 원을 은행시간 마감 전까지 강제로 입금을 시켜야 되는 거였어요. 이틀만 입금이 안 되잖아요? 그럼 이자에 손해배상청구까지 해 버려요. 한 달에 6천만 원이라는 돈을 회사 측에서 가져가는 거예요. 전국에 패밀리마트가 2천 개가 넘어요. 한 지점에서 6천만 원이면 얼마나 많겠어요. 10개만 있어도 6억인데…. 이 6천만 원에서 돈을 6:4로 나누고 물건 값 제하고 나면 1천 5백만 원에서 1천 8백만 원 정도가 저한테 떨어져요. 그러면 월세 몇 백 내고 알바비 주고, 관리비 내고 나면 겨우 제 인건비만 건지는 거예요. 우리는 노예처럼 일만 하는 거예요. 저는 알바비를 깎을 수만 있으면 깎고 싶은 심정이었어요. 점주로서는 알바비를 깎아야 남는 거니까요. 약자끼리 뜯어먹는 형국이에요. 알바생들도 일하기가 너무 힘든 곳이에요. 한 달을 못 채워요. 알바생이 빠지면 또 제가 그 일을 다 해야 했어요. 어떤 때는 하루 24시간을 일한 적도 있어요. 정말 힘들었어요. 근데 알고 봤더니 패밀리마트가 우리나라 브랜드인 줄 알았는데 삼성 뒤에는 일본이 있더라구요. 일본의 기법을 다 전수해주고 돈을 받아간 거예요. 돈 놓고 돈 먹기를 하고 있는 거예요.


4. 패밀리마트(2)- 대한민국에서는 사업하면 안 되겠구나!

이렇게 딱 3년을 일하고 나니까 못하겠더라구요. 계약이 5년인데 만약 그 계약을 지키지 않으면 우리가 뒤집어쓰는 거예요. 이렇게 힘들어 하고 있는데 그 회사에서 정말 좋은 자리가 났다고 저보고 하라는 거예요. 한 개도 힘든데 어떻게 두 개를 하냐, 그랬어요. 그랬더니 자기들이 계약을 할 테니까 보증금에 대한 이자와 월세만 내라는 거예요. 근데 그 자리가 제 가게 바로 옆이었어요. 다른 편의점이 들어 올까봐 나에게 강요를 했던 거예요. 근데 저도 안 하면 경쟁업체가 들어오니까 힘들어질 것 같아서 계약을 했어요. 장사가 잘 됐어요. 그러니까 주인이 보증금을 갑자기 2천만 원에서 1억으로 올린 거예요. 회사에서는 자신이 내줄테니까 이자 달라고 하고. 이런 상태에서는 해도 내 등골만 빠질 것 같았어요. 그래서 내가 안 하겠다고 해서 법정소송을 했어요. 저는 놀랐어요. 소송을 하는데 어마어마한 변호사들로 아주 전문적으로 하는 거예요. 저 같은 사람들은 개인으로 싸우고 힘이 약하잖아요. 질 수 밖에 없는 구조였어요. 자기들이 계약을 했으면 자기들이 내야하는데 저한테 전가한 거예요. 근데 법적으로 내가 졌어요. 계약서에 사인했다는 이유로요. 모든 손해배상을 다 나에게 청구한 거예요. 들어간 돈 한 푼도 못 찾고 두 손 들고 나왔어요. 집은 압류돼서 딱지가 다 붙었어요. 아이 컴퓨터까지 빨간 딱지가 붙었더라구요. 단국대가 이전하면서 다른 한쪽 마트도 임대료도 못 내고 가지고 있던 보증금 다 까먹고 권리금도 못 받고 뺏기고 말았어요. 삼성이란 그렇게 큰 권력이 있는지 몰랐었어요. 편의점이 겉으로는 화려하고 깨끗해 보이지만 그렇게 무서운 곳이었어요. 너무너무 무서웠어요. 아, 대한민국에서는 사업하면 안 되겠구나, 그랬어요.


5. 153 물고기 당구장-그동안 큰 기업들 밥이었어요

이런 일들을 하면서 저는 너무 외로웠어요. 혼자, 나 혼자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그렇게 힘들게 뛰어다니고, 일하고, 당하고…. 제가 패밀리마트 할 때 집에서 그곳까지 걸어 다녔어요. 1년 365일을 똑 같은 길을 걸으면서 비가 왔는지, 눈이 왔는지, 날이 가는지 모르고 살았어요. 돌아보니 30년 전의 나나 현재의 나나 똑 같은 거예요. 그 중간의 시간의 흐름이 사라지고 없었어요.


패밀리마트가 그렇게 되고 저에게 우울증이 왔어요. 하나님이 사람 살아가는 세상을 이렇게 살아가라고 만들었나. 저는 지극히 평범하게 살았는데 한순간 한순간이 끊임없이 ‘갈등과 열등의식과 고통’에 휩싸여서 살은 거예요. 그냥 아파트 베란다에서 ‘공중을 땅이다’ 그러고 걸어 나가고 싶었어요. 하늘과 땅이 구분되지 않을 만큼 비가 쏟아질 때 한강에 가서 광풍에 밀려 사라지고 싶었어요. 굉장히 힘들었어요.


제가 딸과 아들, 이렇게 둘인데 정말 눈물로 키웠어요. 그때 아이들이 중학생, 고등학생이었어요. 한참 공부해야 될 텐데, 제가 힘든 상태로 있으면 안 되겠더라구요. 일을 그만 두니 또 당장 생활이 힘들어졌어요. 그래서 아파트를 전세를 놓고 그 돈으로 다시 용산으로 왔어요. 제가 그동안 너무 힘들었기 때문에 저는 좀 쉬운 일을 하고 싶었어요. 아는 분이 당구장을 하면 쉽다고, 가만히 앉아 있으면 된다고 해서 소개를 받아 용산 4구역으로 왔던 거예요. 그런데 와보니까 이 지역이 개발 지역이었던 거예요. 모르고 왔어요. 그러다가 철거까지 당했어요. 제가 그 당시 권리금까지 1억 4천만 원을 들였는데 3천 몇 백만 원 만 보상해 주겠다고 하더라구요. 여기서 시공사들은 용산 개발로 삼성물산 하나만해도 1조 4천억 원의 이익을 얻어가면서요. 정말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많은 일을 겪었어요. 이제까지 저는 힘든 일이 닥친 것을 제 잘못으로 돌렸어요. 그러나 당구장까지 빼앗기고 나니 내 잘못만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나 같은 사람들은 큰 기업들의 밥이고 나는 그런 인생을 살았던 거예요.


6. 내가 뽑은 것들이 우리들에게 이런 폭력을

망루에 올라갔다가 살아오신 분들 이야기를 많이 들었어요. 너무 추워서 견딜 수가 없었대요. 못 먹고 잠도 못 잔데다가 물대포까지 맞았잖아요. 신발까지 다 젖어서…. 얼마나 추웠겠어요. 살아야겠다는 생각에 빨래줄 타고 내려왔다고 해요. 이 분들이 왜 난민처럼 쫓겨서 이런 대접을 받아야 되는지, 마음이 되게 많이 아팠어요.


제 가게 바로 아래층이 음식점이에요, 삼호복집. 이번 사건으로 돌아가신 양회성 씨가 운영하던 식당이었어요. 그 아저씨가 말이 없으시고 남한테 조금도 피해를 주지 않은 분이었어요. 정말 순박하신 분이요. 조용히 내 할 일만 하시는 분. 근데 그분이 돌아가신 거예요. 머리가 어지러울 정도로 충격을 받았어요. 작년 망년회를 그분 집에서 했어요. 우리들이 상황이 막판이어서 정말 힘들어하고 경직돼 있으니까 그 말없던 분이 우리 웃게 하려고 곱사춤을 추웠어요. 추시면서 그러셔요. ‘우리 나중에 상황이 좋아지면 맘 놓고 한번 놀아보자’시면서 이분들은 그냥 망루에 올라가서 한 달 지내다가 내려올 생각이었어요. 특공대가 투입될 줄 누가 알았겠어요.


특공대를 투입해서 사람들에게 그렇게 잔인하게 진압할 때 제가 후회를 많이 했어요. 그것은 내가 만들어 놓은 굴레였어요. 내가 선거에서 뽑은 것들이 우리들에게 폭력을 행사 하는구나. 제가 그동안 나 자신 밖에 모르고 내 가족을 위해서만 살아왔기 때문에 정치에는 관심이 별로 없어서 계속 한나라당만 찍었거든요, 몇 십 년 동안 계속…. 다 내 탓인 거예요. 이걸 계기로 다른 세상을 살게 되었어요. 그 분들이 그렇게 된 게 다 저처럼 선거를 잘못한 사람들 탓인 것 같아 많이 부끄러웠어요.


7. 저는 지금 휴식기예요

요즘 저는 용산 천막에서 매일 하늘을 쳐다보면서 하나님과 대화도 하고, 책도 읽고 싶으면 읽고,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 하면서, 음식 걱정도 안 하면서 그렇게 지내고 있어요. 그동안 한 번도 생활 걱정 안 하면서 산 적이 없었어요. 언제나 먹고 살려고 가슴조이면서 살았어요. 저에게 지금은 7일마다 오는 안식일처럼 자신을 되돌아보게 하는 휴식기예요. 이 긴 휴식기를 끝내고 다시 원상회복되어서 떳떳한 국민으로 세금내면서 밝게 살고 싶어요.


제가 일상으로 돌아간다면 밥장사를 하고 싶어요. 배고픈 사람들에게 따뜻한 밥 한 끼씩 해 주는 그런 사람이 되고 싶어요. 따뜻하고 행복하게. 테이블이 두 개만 있어도 괜찮아요. 테이블 회전을 빨리 해서 많은 사람들을 받고 싶은 생각도 없어요. 이제 그런 생각이 없어졌어요. 그냥 필요하신 분들에게 느긋하게 밥 한 그릇 먹고 갈 수 있도록 해 주고 싶어요.

 

* 이 글은 인권재단 사람이 발행하는 격월간지 <세상을 두드리는 사람> 9·10월 호에 실렸던 글입니다.

 

 


  
  김남선님 남김   2009.10.04 12:54   덧말수정 덧말삭제
정말 눈물납니다. 그리고 많이 죄송합니다. 아무런 도움도 드리지 못하고...
저도 식당을 해요. 연신내에서. 처음에 권리금 7천을 주고 들어왓는데 지금 3천5백만 달라고 해도 안나가요. 아침 7시부터 나와서 준비하고, 12시에 마치면 파김치가 되고, 그렇다고 돈도 안되고,이 잘난 일땜에 용산에 가고 싶어요 몇번 못갔어요. 휴일이 없어요. 추석이라 3일 쉬어요. 어제 혹시나 하고 갓는데 미사가 없더군요. 내일 하루 더 갈려고요. 미안해요. 정말 미안해요. 한 하늘 아래 살면서 이렇게 몰인정하게 사는 제가 참 싫습니다. 이 눈물도 다 거짓이에요. 사람이면 이렇게 살 수는 없는건데... 부부가 하는 식당이라 남편이(용산)가면, 딸래미가 봐주고, 딸래미가 가면 남편이 하고, 저의 마음은 항상 무겁습니다.용서해 주세요. 부디 용기 잃지마시고 끝까지 함께 해요.사랑합니다...
  시민님 남김   2009.10.14 23:24   덧말수정 덧말삭제
김남선님도 힘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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