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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차 전국사제시국기도회 안동교구서 열려

작성일
2009.09.01 19:0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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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당하게 그들 한 가운데로 걸어갑시다

제9차 전국사제시국기도회 안동교구서 열려

 

 

 

 

'시대의 아픔에 동참하여 생명 평화를 지키지 위한 제9차 전국사제시국기도회'가 8월 31일 안동교구 묵정동성당에서 개최 되었습니다.

이번 시국기도회에는 사제 46명을 비롯해 많은 수녀님들과 신자, 시민 등 많은 분들이 함께해 주셨습니다.

하느님 앞에  멀어져 가는 민주주의를 안타까워 하며 민주주의 회복을 위해, 우리의 소중한 권리들을 빼앗기고 있는 현실을 안타까워하며 국민들을 무시하는 위정자들의 마음을 바로잡아 주시기를 바라며, 용산참사 희생자들의 억울함 죽음의 진실이 밝혀기지를 바라며 마음을 다해 하느님 앞에 기도하였습니다.

 

김영식 신부님은 강론에서 "어느 추운 새벽 졸지에 미망인, 고아, 테러리스트가 되고도 224일씩이나 장례도 치르지 못한 사람들이 그곳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곳에 자기 의지와는 전혀 상관없이 생명을 잃은 사람들이 울고 있기 때문입니다. 법원의 판결에도 불구하고 수사기록 3000쪽을 돌려받지 못하고 진상이 제대로 규명되기를 원하는 사람들, 살인마, 테러리스트라는 누명을 쓴 채 차가운 사체 냉동고와 감옥에 갇혀있는 아버지와 아들, 남편의 누명이 벗겨지기를 원하는 사람들, 구속된 이웃이 하루빨리 석방되기를 원하는 사람들, 장례를 치르고 구천을 떠돌 영혼들을 위로하고 싶은 사람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곳에 사람이 있었고, 그 사람들이 죽었기 때문입니다. 그곳에 예수 그분이 깊은 연민의 정으로 함께하고 있기 때문입니다"라며 용산참사 현장에서 천막을 치고 기도하는 이유라고 하였습니다.

 

 

이어 "지난한 싸움이 될 것입니다. 메아리 없는 싸움처럼 보일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처럼 많은 이들이 화를 내며 들고 일어나 우리를 동네 밖으로 몰아내려 할 것입니다. 산벼랑으로 밀어 떨어뜨리려 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모두 그 모든 것들의 한 가운데로 당당하게 걸어 우리의 길, 연대의 길, 사랑의 길, 예수의 길을 갑시다"라며 함께 용산참사의 진실을 밝혀나가자고 하였습니다.

 

유가족 전재숙 님은 "수사기록 3천쪽 없는 재판은 할 수없습니다. 그래서 전국방방곡곡을 돌며 3천쪽을 내놓으라고 외치며 다니고 있습니다. 3천쪽엔 왜곡되고 잘못되어 있는 수사기록이 있을 것입니다. 돌아가신 분들의 명예회복과 진상규명을 위해서는 꼭 수사기록 3천쪽 공개가 필요합니다"라며 수사기록 3천쪽 공개를 촉구하였습니다.

 

한편 전국사제시국기도회에 앞서 이수호 민주노동당 최고위원(전 전교조위원장)의 강연이 있었습니다.

 

 

 

         제9차 전국사제시국기도회 강론                   김영식 신부

 

 

2009년 1월 20일, 용산에서 살기 위해 망루에 올랐던 철거민 다섯 명과 경찰 한 명이 목숨을 잃은 지도 벌써 224일째가 되었습니다. 지난 6월3일 서울대 교수들로부터 시작된 시국선언이 각개 각층으로 확산되었습니다. 우리 교구 사제 대부분을 포함한 전국의 사제 1200여분도 6월15일 시국선언에 동참하였습니다. 그리고 시대의 아픔에 동참하고 죽어가는 민주주의, 생명, 평화를 살리기 위한 전국 사제 시국기도회를 열기로 결정하였습니다. 오늘 우리는 참사 발생 224일째. 아홉 번째 시국기도회를 열고 하느님께 기도드리고 있습니다.

 

전국의 사제 1200여명은 시국선언을 통해 "대통령이 이토록 국민의 줄기찬 요구를 정면으로 거부하고 헌법준수의무를 저버릴 바에야 차라리 그 막중한 직무에서 깨끗이 물러나야 옳다는 것이 우리 사제들의 입장"이라는데 동의하고 "이제 대통령을 향한 애달픈 호소가 아니라 진짜 국가공동체를 차분하고 냉정하게 준비하는 일"을 해 나갈 것을 국민들과 신자 분들에게 호소한 바 있습니다. 그렇다면 왜 사제들은 진짜 국가 공동체를 차분하고 냉정하게 준비해야 한다고 호소하는 것일까요? 왜 다른 화급한 일들을 제쳐두고 용산 남일당 현장에 천막을 치고 기도를 드리며 전국을 돌며 시국기도회를 열고 있는 것일까요?

 

국가 권력의 횡포가 점입가경입니다. 시민들의 자발적인 의사 표현을 '법치'의 확립이라며 가로막고 탄압하는 권력, 4대강 살리기라는 이름으로 포장하고 수십조원의 혈세를 쏟아 붓는 한반도 대운하 사업, 다수 국민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날치기로 처리한 방송악법, 비핵개방 3000이라는 어처구니없는 구상을 내세워 6.15 공동선언과 10.4 공동선언의 정신이었던 화해와 상생의 남북관계를 파탄내고 대결과 분쟁으로 몰아가는 통일정책, 서민을 위한 정책을 펼치겠다지만 정작 서민은 없는 경제 정책 등. 돌아보면 한숨이요 내다봐도 한숨을 쉴 수밖에 없을 지경입니다.

 

사실 이런 지경에 이른 것은 우리 양심의 누추함, 저급한 근대화의 시대를 앞뒤 돌아 보지 않고 마구 달려온 우리의 책임입니다. 경제성장에 대한 막연한 동경이 우상처럼 자리 잡고 있는 우리 삶의 방식 때문입니다. 충분히 먹고 살만한데도, 보다 나은 생활이란 돈을 벌어 부자 되는 길 뿐이라는 욕망과 '민주주의가 밥 먹여 주느냐?'는 정서가 우리를 지배하는 한 4대강 살리기, 뉴타운 건설이라는 이름으로 마구 시행되는 삽질은 멈추지 않을 것입니다. 물론 서민들과 소시민들의 '보다 나은 삶의 실현'이라는 소박한 욕망이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국가 권력의 횡포가 점입가경이고, 누추한 양심을 가지고 살아온 우리 삶에 대한 처절한 반성을 위한 것이기도 하지만 '여기에 사람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곳에 사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잘 살아 보겠다는 소박한 욕망을 갖고 어렵지만 성실한 삶을 살던 아버지와 아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생면부지의 사람들이지만 고통을 함께 나누기 위해 생업을 잠시 미루고 추운 겨울 망루에 올랐던 이웃사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아침저녁으로 문을 열고 문을 닫으며 서로 기쁨과 슬픔을 나누던 사람들이, '법치의 확립' '효율과 실용' '아름다운 새 도시 건설'이라는 명분 때문에 목숨을 잃은 사람들이 거기 있기 때문입니다. 어느 추운 새벽 졸지에 미망인, 고아, 테러리스트가 되고도 224일씩이나 장례도 치르지 못한 사람들이 그곳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곳에 자기 의지와는 전혀 상관없이 생명을 잃은 사람들이 울고 있기 때문입니다. 법원의 판결에도 불구하고 수사기록 3000쪽을 돌려받지 못하고 진상이 제대로 규명되기를 원하는 사람들, 살인마, 테러리스트라는 누명을 쓴 채 차가운 사체 냉동고와 감옥에 갇혀있는 아버지와 아들, 남편의 누명이 벗겨지기를 원하는 사람들, 구속된 이웃이 하루빨리 석방되기를 원하는 사람들, 장례를 치르고 구천을 떠돌 영혼들을 위로하고 싶은 사람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곳에 사람이 있었고, 그 사람들이 죽었기 때문입니다. 그곳에 예수 그분이 깊은 연민의 정으로 함께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 4대강을 살리자며 삽질을 마구 해대는 것도 부자 감세, 미디어 악법을 날치기 하면서 내세우는 생뚱맞은 일자리 창출이라는 구호도, 뉴타운 건설 등 각종 경제정책도 사람의 생명을 풍요롭게 하자는 것 아닙니까? 1인당 국민 소득이 10배, 100배로 늘어나 예전에는 꿈도 꾸지 못하던 온갖 것들을 누리며 산다 하더라도 거기에 생명이 없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리고 무엇보다도 오늘 복음을 포함한 우리 주 예수님의 가르침이 예수를 따르는 이들의 소명이 무엇인지를 잘 말해 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성령이 나에게 내리셨다. 주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으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셨다. 주께서 나를 보내시어 묶인 사람들에게는 해방을 알려주고 눈먼 사람들은 보게 하고, 억눌린 사람들에게는 자유를 주며 주님의 은총의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 이 성서의 말씀과 예수의 모든 가르침이 오늘 이 자리에서 이루어지도록 하는 것이 모든 신앙인들에게 바라는 예수님의 당부요, 그곳이 하느님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이 당부야 말로 오늘 우리가 시국기도회를 여는 이유이며, 그곳에 천막을 치고 기도하는 이유이고, 사람이 있는 곳에 그것도 가장 고통 받고 아픈 사람들의 곁에서 함께 하는 이유입니다.

 

지난한 싸움이 될 것입니다. 메아리 없는 싸움처럼 보일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처럼 많은 이들이 화를 내며 들고 일어나 우리를 동네 밖으로 몰아내려 할 것입니다. 산벼랑으로 밀어 떨어뜨리려 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모두 그 모든 것들의 한 가운데로 당당하게 걸어 우리의 길, 연대의 길, 사랑의 길, 예수의 길을 갑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