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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래군 집행위원장 1심 최후진술서 -"용산투쟁에서 새로운 희망을 보았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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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1.26 13:3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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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mbout.jinbo.net/webbs/view.php?board=mbout_6&id=534

최 후 진 술 서

   

재판장님,

지난 2월부터 저희들의 재판을 공정하게 진행하여 오신 점에 대해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더욱이 지난 4월 30일 보석을 허가하여 불구속 상태에서 재판에 임할 수 있는 기회를 주셨습니다. 이 점에 대해 특별히 깊은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피고인의 입장에서는 구속 상태에서 재판을 받는 것보다 불구속 상태에서 재판에 임하는 것이 방어하는데 현격한 차이가 있습니다. 그러기에 우리 형사소송법도 불구속 재판을 원칙으로 설정하고 있는 줄로 압니다.

 

재판장님, 저는 수배자와 수감자로 420일 넘게 갇혀 살아야 했습니다. 지난해 1월 20일 발생한 용산참사 이후 저는 개인의 삶을 포기해야 했습니다. 용산범대위의 공동집행위원장이 저의 공식적인 직함이었고, 그 일을 수행했다는 이유로 지난해 3월초부터는 수배자가 되어 숨진 용산철거민들이 시신이 되어 누워 있던 순천향병원 영안실에서 은신해야 했고, 9월초부터는 명동성당에서 다시 수배생활을 이어갔습니다. 그러다가 지난해 12월말, 극적으로 정부와 서울시와 장례절차에 관한 협상을 마무리지었고, 그런 뒤 올해 1월 9일 용산 철거민 열사들의 장례를 지냈고, 1월 11일에는 명동성당을 나와 수감생활을 해야 했습니다. 보석으로 석방이 된 다음에도 용산범대위의 후신인 용산참사 진상규명 및 재개발제도 개선위원회의 집행위원장으로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2009년 1월 20일 이후의 저의 삶은 용산참사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게 되었습니다. 아마도 용산참사가 잘못된 공권력에 의해 자행된 학살이며 참극이라는 점에 동의하는 사람들이라면 저와 마찬가지의 심정일 것입니다.

 

하지만 저는 이런 처지를 피하지도, 비관하지도 않았습니다. 지난해 3월 20일, 당시 사전구속영장이 발부되어 영장실질실사를 받아야 하는 입장이었던 저는 재판부에 공개편지를 보낸 적이 있습니다. 그때 분명히 밝혔듯이 법정에 출두해서 영장실질심사를 받고 수감이 되는 길이 오히려 제게는 편한 길이 될 것이었습니다. 아마도 그때 출두하여 영장실질심사를 받았더라면 저는 수감되었다가 보석으로 풀려나서 보다 자유로운 상황에서 활동을 했을 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저는 굳이 더 어려운 수배생활을 택했습니다. 그것은 저에게 주어진 책임으로부터 도피하지 않고 그 책임을 다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유가족이 되어 영안실을 눈물과 한숨으로 지켜야 하는 유가족 곁을 지켜주어야 했고, 용산범대위의 크고 작은 일들에 대해 책임을 나누어져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 편지에서 썼듯이 저는 용산철거민 열사들의 장례를 치룬 뒤에 수배생활을 스스로 청산했습니다. 다시금 말하지만 그때 저는 책임으로부터 도피하려던 것이 아니라 오히려 책임을 다하기 위해 스스로 수배자의 길을 들어섰던 것입니다.

 

저의 죄를 벌하기 위해서는 인권활동가로 살아온 제가 왜 용산참사 문제에 적극적으로 개입하여 그 책임을 도맡아야 했는지를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용산참사와 관련한 저의 생각부터 말씀드리는 것이 순서일 것입니다. 지금부터 그에 대한 저의 생각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용산참사는 국가폭력이고, 국가범죄입니다.

 

저는 용산참사는 인권을 실현해야 하는 의무를 진 국가가 그 의무를 망각하고 폭력으로 국민을 죽음에 이르게 한 국가폭력이자 국가범죄라고 생각합니다. 이에 대한 저의 생각부터 말씀드리겠습니다.

먼저 따져 봐야 할 것은 국가폭력이 무엇인가입니다. 폭력에 대한 정의도 매우 어려운 일이지만, 가장 일반적으로 인용되는 것은 요한 갈퉁의 정의입니다. 갈퉁에 의하면, 폭력은 직접적 폭력과 간접적 폭력으로 구분됩니다. 그는 직접적 폭력을 특정 사람이나 세력이 행위자로 개입하는 것을 두고 말하고, 간접적 폭력은 사회구조나 법․제도에 의해서 발생하는 폭력을 의미합니다. 보통 사람들은 폭력을 말할 때 직접적 폭력만 보려고 합니다. 그렇지만 구조적 폭력에 의한 폭력은 더욱 광범위한 범위에서 벌어지게 되므로 직접적 폭력만큼이나 문제가 됩니다. 또 갈퉁이 보기에 직접적 폭력이나 간접적 폭력을 정당화시키는 문화적 폭력과 폭력을 다음 세대까지 이어지게 하는 시간적 폭력이 문제라고 보았고, 이런 폭력이 서로 연결되어 발생할 때에는 매우 심각한 폭력의 악순환을 낳게 된다고 갈파했습니다.

 

국가폭력의 주체는 국가입니다. 국가가 저지르는 직접적인 폭력과 간접적인 폭력, 문화적 폭력, 시간적 폭력이 모두 이에 해당할 것입니다. 현대 인권이론에서는 국가가 직접적인 폭력의 제거를 위해서 노력하는 것을 소극적 의무를 이행하는 것으로 봅니다. 국가는 소극적인 의무를 넘어서 인권의 실현을 위한 적극적인 의무를 다할 것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입법을 통해서 국가가 폭력과 차별의 시정을 위해 노력해야 하며, 자원의 배분을 통해서 구조적인 폭력이나 차별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라는 주문입니다. 아울러 사법부도 구조적인 폭력까지 사법심사의 대상으로 올려놓고 적극적으로 개입하여 시정하라고 요구합니다.

 

이와 같은 관점에서 용산참사를 국가폭력에 초점을 맞추어 생각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용산참사는 명백한 직접적 국가폭력이었습니다. 정부가 아무리 변명을 해도 용산 4구역 남일당 건물 옥상 망루에 오른 철거민들을 경찰 특공대를 투입해서 진압하지 않았다면 용산참사와 같은 불행한 일은 발생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전의 재개발 지역에서도 철거민들은 두렵기만 한 철거용역깡패들의 폭력을 피해 건물 옥상에 망루를 세우고 마지막 저항을 하고는 했습니다. 그럴 때 경찰은 대화를 주선하고, 설득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그래서 용인 어정가구단지에서는 심지어 1년 6개월 동안 망루투쟁이 진행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용산에서는 달랐습니다. 2009년 1월 19일 새벽, 철거민들이 망루를 짓기 시작한 뒤 3시간 만에 전격적으로 대테러 진압부대인 경찰특공대를 투입하는 작전계획을 수립했습니다. 그리고 당시 서울경찰청장이었던 김석기는 그날 밤에 이 작전을 최종 승인했고, 운명의 1월 20일 새벽 1,400명의 경찰특공대가 철거민들의 망루농성을 진압하기 위해서 진압작전을 시작했습니다. 추운 겨울날 물포를 사면에서 쏘아대고, 컨테이너 박스에 특공대를 태워 크레인으로 올려서는 망루를 해체시키려 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엉성하게 골조만 세워놓았던 망루는 안에서부터 무너져 내렸고 이윽고 대형화재가 발생했습니다. 그리고는 곧 망루에서 탈출한 농성 철거민들이 옥상 난간에 매달려 안타깝게 구조를 기다리다가 지상으로 추락했습니다. 대형화재가 있기 전에 작은 화재가 났다가 진압되었는데, 그때만이라도 진압을 멈추고 구조부터 하려 했다면 아마도 대형참사는 일어나지 않았을지 모릅니다.

생존권을 지키기 위해 망루를 짓고 농성에 들어간 철거민들은 채 40명이 되지 않았습니다. 누가 봐도 망루는 공격용이 아니라 방어용입니다. 그런 철거민들을 상대로 대테러부대인 경찰 특공대를 투입하고, 1,400명의 경찰을 동원하여 한겨울 새벽에 진압작전을 감행했는가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이런 사실은 마지막 방어수단으로 망루를 짓고 대화를 통한 협상을 진행하자고 했던 철거민들을 정부는 진압의 대상으로만 삼았습니다. 결국 철거민들은 국가의 보호를 받아야 할 국민으로 대우받지 못하고, 도심 테러나 저지르는 불법행위자로 매도되었습니다.

 

두 번째 진압방식입니다. 특공대는 진압을 하면서 무지막지한 폭력을 휘둘렀습니다. ‘다 죽여!’라는 지휘자의 명령에 따라 그들은 마치 적군을 토벌하는 군대처럼 행동했습니다. 철거민들의 안전을 고려한 흔적은 찾을 수 없었습니다. 매트리스도 제대로 깔리지 않아서 화재가 난 망루를 탈출했던 농성 철거민들은 난간에 매달려 구조를 기다리다가 지상으로 추락했고, 그때 입은 중상으로 인해 병원 치료를 받고 있습니다. 이것은 경찰의 농성 진압 기본 매뉴얼을 외면한 것입니다. 최대한 안전하게 인명이 상하지 않게 진압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진압방식에서 특이한 점은 이제 컨테이너 박스를 크레인으로 올려 특공대를 투입하는 작전이 본격적으로 사용되었다는 점입니다. 이 진압방식은 예전에도 간간히 사용되다가 용산에서 등장했고, 지난해 8월에는 쌍용자동차 노동자들의 공장 점거 농성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다시 선을 보여 이제는 확고부동한 진압방식으로 굳어졌음이 분명해졌습니다.

 

세 번째 진압의 결과를 누구나 예측할 수 있었음에도 무리한 진압이 강행되었다는 점입니다. 통상 철거민들의 망루 농성은 마지막 극한적인 투쟁이기 때문에 경찰과 용역깡패들을 저지하기 위해 화염병이나 식량 등을 비축하고 하는 투쟁 방식입니다. 망루에는 휘발유나 세녹스와 같은 유류들이 엄청나게 많기 마련이라서 보통 이와 같은 경우는 준비를 철저하게 한 다음에도 진압을 서두르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형참사가 날 수 있는 진압을 택한 것은 무슨 이유 때문일까요? 아마도 정치적인 판단을 내린 주체가 따로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재판과정에서 특공대 지휘관들은 위험물질이 다량으로 망루 안에 있다는 점을 부하들에게 알리지 않은 채 진압을 밀어붙였다고 진술했습니다. 특공대 지휘관들은 부하들을 사지로 내몰았던 것이고, 그런 결과는 애초부터 충분히 예측할 수 있었습니다.

 

결국 용산참사는 직접적인 국가폭력에 의해서 발생했습니다. 그로 인해서 철거민 다섯 명과 진압에 투입되었던 특공대원 한 명이 사망했고, 수십 명이 부상을 당했습니다. 그런데 농성 철거민들만 구속, 기소되었고, 살인진압을 자행했던 경찰들은 검찰과 사법부로부터 '정당한 공무집행‘을 행사했다는 이유로 면죄부를 받았습니다.

 

국가는 부인(否認)을 통한 진실의 은폐로 일관했습니다.

 

하지만 국가폭력은 그것으로 그치지 않았습니다. 용산참사는 집권 2년차에 접어들었던 이명박 정부의 이른바 국정기조인 “법과 원칙”의 정치가 집약적으로 구현된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대규모 수사본부를 결성한 검찰은 먼저 유가족들을 빼돌리고 강제부검을 단행했습니다. 당연히 진실을 은폐하기 위해서 부검을 서둘렀다는 의심을 받기에 충분했습니다.

 

이명박 대통령은 이 사건 이후 원칙적인 입장을 견지하여 "선 진상규명, 후 재발방지“란 입장을 펼쳤고, ”용산 사고가 일어나려면 늦게 나던지 했어야지 바로 터졌다“면서 강제진압을 통한 학살의 지휘자였던 김석기 경찰청장 내정자에 대해서 ”아까운 사람 나간다“라고 안타까움을 표현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이때의 시점은 2월 9일 검찰의 최종 수사결과가 발표된 지 이틀 뒤라는 점에서 그 의미는 실로 깊기만 합니다. 경찰청장 내정자의 사퇴를 안타까워할지언정 경찰의 진압과정에서 숨진 철거민들의 죽음에 대해서는 일말의 책임도 느끼지 못한다는 냉혹함이 그대로 묻어납니다. 아침 출근 시간에 일어난 이 참사는 방송과 인터넷 생중계를 통해서 생생하게 전 국민에게 전달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명박 정부는 강제진압에 의한 학살을 부인(否認)했고, 지금까지도 그 부인의 태도는 바꾸지 않고 있습니다.

 

스탠리 코언은 국가의 폭력에 의한 인권침해 이후 국가가 이런 인권침해를 부인하는 방법을 세 가지로 정리했습니다. 조효제 교수는 스탠리 코언의 책을 옮기면서 용산참사와 관련하여 국가의 세 가지 부인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습니다.

 

경찰은 직무수칙을 철저히 준수했다. 용역업체와 공모하지는 않았다, 과잉진압은 없었다.(문자적 부인)

 

사망자 발생은 사실이지만 정당한 공무집행 중 일어난 것으로 인권침해라 할 수 없다. 농성자들이 뿌린 시너에 화염병 불이 붙어 난 사고이므로 경찰에 책임을 묻긴 어렵다. 외부세력이 개입했으니 선량한 피해자들의 순수한 자구 움직임이 아니다.(해석적 부인)

 

책임자 파면과 처벌보다 진상규명이 우선이다. 진압 책임자 사퇴 주장은 반정부세력의 체제전복 시도이다. 공무원의 적법한 행위를 처벌하면 누가 열심히 일하겠는가.(함축적 부인)

 

그가 정리한 세 차원의 부인인 ‘문자적 부인, 해석적 부인, 함축적 부인’의 방법은 용산참사가 발생한 이후 정부가 거의 동시에 사용한 방법들입니다. 이 세 차원의 부인방법은 국가가 갖고 있는 모든 수단을 통해서 자행되어서 사건의 진실규명을 더욱 어렵게 만들었습니다.

 

그렇다면, 이명박 정부가 이 세 가지 차원의 부인을 통해서 얻고자 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당연한 얘기지만 용산참사와 관련한 정부의 책임을 회피하고자 합니다. 용산참사와 관련해서 정부는 ‘정당한 공무집행’ 대 ‘불법행위’의 구도를 처음부터 만들었습니다. 철거민들의 농성이 도심테러에 해당하는 매우 위험한 행위이므로 공권력이 투입된 것은 당연하고, 공권력의 치안질서 유지를 위한 공무집행, 즉 공권력의 투입은 정당한 것이었으며, 그 과정에서 다소 실수로 사람들이 죽었다고 해도 그 책임을 물을 수 없다는 입장을 견지했습니다.

 

이에 따라 모든 책임은 폭력적인 방법으로 철거투쟁을 자행해왔고, 용산에서도 망루라는 극한적인 투쟁을 벌인 전철연에 있다면서 그 조직 자체를 해체시키려고 집요하게 탄압을 진행했고, 지금도 해오고 있습니다. 이런 과정에서 경찰의 안전대책 없는 강경진압, 이를 통해서 정치적인 효과를 얻고자 했던 정부의 정치적 의도는 감춰졌습니다. 이를 위해서 조중동과 같은 보수언론을 활용하여 전철연을 마녀사냥하고, 검찰 권력을 이용해서 농성 철거민들을 구속하고, 법원을 통해서는 재판을 진행하면서 법적인 책임 공방으로부터 정권 담당자들은 도망쳐 버립니다. 그렇기 때문에 정부는 용산참사 문제를 사인(私人) 간의 이익이 충돌하여 발생한 문제로 한정하고, 자신들은 아무런 책임이 없으므로 협상이나 어떠한 대화에도 응할 수 없다고 버티었습니다. 이런 과정을 통해서 용산참사의 사실적인 원인이었던 공권력의 무모한 진압 문제는 가시권에서 사라지게 만들었습니다.

 

용산참사 문제가 장기화된 데는 이처럼 책임을 회피하고 부인했기 때문입니다. 결국 용산투쟁은 이명박 정부가 책임을 회피하려고 부인하는 것을 거부하고, 정권의 책임이 있음을 분명히 밝히고 책임지는 모습을 보이게 하는 시인(是認) 투쟁이기도 했습니다. 그 시인은 참사의 원인이었던 경찰에 의한 강경진압의 책임을 묻는 것이 가장 우선적인 내용이고, 이에 대해 사과라도 해야만 용산참사는 풀릴 수 있었던 것입니다.

 

간접적 국가폭력인 살인재개발이 근본원인입니다.

 

용산참사 이전에도 재개발 사업이 진행되는 곳에서는 언제고 폭력이 난무했습니다. 1970년대 이래 재개발 사업은 건설자본과 땅 투기꾼들에게는 ‘황금알을 낳는 거위’였습니다. 대한민국에서 부자들은 부동산 투기로 한 몫 챙기지 않고는 탄생 자체가 불가능했습니다. 초기에는 판자촌, 달동네로 통칭되던 빈민지역들이 그 대상이었습니다. 판자촌을 쓸어버리고 그곳에 아파트 단지를 지으면서 수십 배, 수백 배의 수익을 올릴 수 있었습니다. 그럴 수 있었던 데에는 국가의 정책적인 뒷받침만이 아니라 물리력까지 동원한 거들기가 한몫했습니다. 철거 현장에는 늘 철거용역깡패들이 출몰했고, 그들은 경찰과 법의 보호를 받으면서 철거민들을 폭력으로 몰아냈습니다. 재개발지역은 무법천지의 공포지대로 변했고, 사람이 살고 있는 생가마저도 무자비하게 부숴버리기 일쑤였습니다. 조세희 선생이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을 발표했던 게 1978년이었는데, 그때 그려진 비참한 재개발의 현장은 현재에도 그대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용산 4구역에서 철거를 맡은 호람건설과 현암건설산업은 ‘래미안’으로 이름 높은 삼성물산의 대형 아파트 건설현장에서 철거를 도맡아 진행했던 업체들이었습니다. 이들이 용산 4구역에 들어온 날부터 철거민들은 공포에 떨어야 했습니다. 덩치는 산만한 깡패들은 영업하는 가게에 들어와 괜한 시비를 걸어서 손님들을 쫓아냈을 뿐만 아니라 가게에 오물을 투척하고, 벽마다 살벌한 낙서를 해댔습니다. 거기에 항의하면 곧바로 주먹이 날아들었습니다. 그들의 폭력은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았습니다. 아이들이 보는 앞에서 부모가 매 맞고, 며느리가 보는 앞에서 시아버지가 쌍욕을 듣고 불알을 잡히는 모욕까지 당했습니다. 그럴 때 철거민들은 경찰을 찾았지만 경찰은 출동하지 않거나 출동해서도 용역깡패들은 연행하지 않았습니다. 만약 철거민들과 용역깡패들 사이에 충돌이 일어나면, 오히려 형사 처벌되는 것은 철거민들이었습니다. 더 많이, 더 심하게 두들겨 맞고도 경찰은 철거용역깡패들을 입건하지 않은 채 철거민들만 입건하고 검찰은 그런 경찰의 수사결과를 인정하고, 사법부도 철거민들에게 유죄를 선고하기 마련이었습니다. 공포에 질린 철거민들은 자신들이 억울함을 호소하지도 못한 채 철거지역을 떠나야 했습니다.

 

용산 4구역은 용산역 역세권이라는 입지로 인해서 오랫동안 상권이 발달한 지역이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이곳에서 장사를 하는 상가 세입자들은 점포를 얻으면서 보증금만이 아니라 권리금을 내야했고, 초기 시설투자비를 투자해야 했습니다. 그렇지만 재개발과정에서는 이런 사정은 고려 대상이 아닙니다. 권리금이나 초기 시설 투자비와 같은 것은 인정되지 않은 채 3개월 치의 영업손실보상비만 받고 떠나라는 게 현행 법체계에서는 유일한 보상이었습니다. 다른 재개발 지역에서처럼 용산 4구역에서도 세입자들은 재개발 관련 정보에 접근할 수 없었고, 소문으로만 무성하던 재개발을 졸지에 당하게 되었습니다. 이들은 재개발이 이루어진 다음에 다시 그 지역에서 영업을 할 수도 없었습니다. 워낙 땅값이나 가게 시세가 올랐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재개발지역에서 생활하던 이들은 변두리로 밀려나게 되어 서울을 떠나고, 수도권 일원으로 흩어지게 됩니다. 따라서 주거 세입자이거나 상가 세입자들에게 재개발은 사실상 자신들의 전 재산을 하루아침에 모두 잃고 쪽박을 차고 거리에 나앉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재개발을 통해서 건설자본과 토지 소유자들은 많은 수익을 올릴 수 있고, 현행 재개발 관련법과 제도는 바로 이런 수익성을 중심으로 진행되기 때문에 서민들은 늘 재개발로 인해서 오히려 심각한 피해를 입고, 자영업자가 빈민으로 몰락하는 계기가 됩니다.

 

이처럼 법과 제도에서 약자인 세입자들을 무권리 상태로 강제로 쫓아낼 수 있도록 법과 제도를 인권의 기준에 맞도록 개선할 적극적인 의무가 국가에게 있었지만, 국가는 그러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국회는 입법을 통해 약자인 세입자들을 쫓아낼 수 있는 법률과 제도를 만들었고, 정부는 이 법과 제도를 폭력적으로 모든 재개발 사업에 적용했습니다. 사법부는 철거민들에게 일방적으로 불리한 법을 적용해 사법 처리했습니다. 이런 사법부의 자산계급에게 유리한 판결을 일삼는 현상을 일컬어 ‘계급사법’이라고 합니다.

 

인권의 실현은 국가폭력의 제거로부터 시작됩니다.

 

용산참사 이후에 은폐와 왜곡을 일삼으면서 책임을 지지 않으려는 정부에 맞서 용산범대위는 지속적으로 싸웠습니다. 하지만 추모대회도, 삼보일배도, 심지어는 1인 시위도 경찰력을 동원해 강제로 막은 게 정부였습니다. 정부는 용산참사의 진실이 밝혀지는 것이 두렵기 때문인지 법적인 근거도 없이 ‘용산’의 ‘용’자도 꺼내지 못하게 철저하게 막았습니다. 그래서 용산범대위의 투쟁에 대해서는 연행, 소환, 수배, 구속으로 대응해왔고, 용산참사 철거민 열사들의 장례가 끝난 지금까지도 관계자들을 소환하고, 처벌하고 있습니다.

 

이런 조건 속에서 유가족과 용산범대위는 우선적으로 장례를 치를 수 있도록 최소한의 조건을 마련하자고 요구했습니다. 우선 중요한 것은 정부의 사과였습니다. 정부가 경찰을 투입하여 사람을 죽였으니 그에 대한 책임을 인정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살인적인 재개발 정책의 전환을 선언해라고 했습니다. 그 재개발 정책의 전환을 위해서 참사가 일어난 용산 4구역에서부터 임대상가(재개발 이후)와 임시시장(재개발 공사 중)를 보장할 것으로 요구했습니다. 이를 계기로 전면적으로 세입자들의 생존권을 보장하는 방향으로 재개발 정책과 법제를 바꾸어야 한다는 주장했습니다. 지금과 같이 건설자본가 땅 투기꾼들이 수익성만을 배려하는 재개발 정책이 중단되지 않는다면 뉴타운, 도심재개발, 도시환경정비 등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수많은 재개발사업 과정에서 제2, 제3의 용산참사가 발생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이와 함께 가장을 잃은 유가족들이 생계를 유지할 수 있도록 보상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지극히도 정당한 요구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할 정부와 서울시는 서로 책임을 떠넘기다가 지난해 말에 이르러서야 정치적 상황이 불리하게 돌아가자 급작스럽게 협상 테이블에 나왔고, 우리도 그에 응해서 장례절차에 대한 타협이 이루어졌습니다. 이런 대타협을 통해서 비로소 355일 만에 용산참사 철거민열사들을 장례 지내드릴 수 있었습니다. 2010년 1월 9일, 마치 2009년 1월 20일처럼 찬바람 불고 눈발이 거세게 내리는 서울 거리에서 영결식과 노제를 지내고, 언 땅에 그 분들을 눈물로 묻었습니다.

 

지금까지 충분하지는 않지만 용산참사에서 국가의 직접적, 간접적 폭력을 모두 확인했습니다. 어쩌면 이명박 정권에게 용산참사의 책임을 인정하고 사과하라고 주문하는 것 자체가 무리한 것일 수 있습니다. 그것은 결국은 정권의 입장에서는 자신들의 존립근거를 부정하는 일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직접적 폭력의 당사자로 등장하게 되는 정권은 어떤 이유로도 정당성을 얻기 힘듭니다. 민주주의 사회는 그런 정부에 저항하는 것이 당장은 실정법을 어기는 것일지라도 정의라고 정당화합니다. 인권의 관점에서도 국민의 생명을 앗아가고, 그것을 억압과 은폐를 통해서 부인하는 정부에 대해서 저항하는 것을 당연한 권리라고 정당화합니다.

 

이명박 정부에 들어와서 인권과 민주주의라는 가치는 계속 부정당하고 있습니다. 정부는 ‘법과 원칙’을 말하지만, 정부가 말하는 법치는 형식적 법치일 뿐, 실질적으로 법치에 반하는 독재적인 법치입니다. 법의 근본에는 인권의 가치가 존중되어야 하는데, 인권을 부정하는 법치라는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법에 의한 독재일 따름입니다.

 

 

사법부는 진실을 외면했습니다.

 

이런 적나라한 국가폭력에 대해 사법부는 ‘강한 자의 정의’를 선택했습니다. 사법부가 상대적으로 정치적 독립을 이룬 뒤에 보이는 태도는 강한 자, 지배세력의 입장을 적극적으로 대변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민중들의 절박한 생존권적 요구는 간단히 외면하고, 자본가와 정치권력의 입장을 번번이 적극적으로 편들어왔습니다.

 

용산참사에 대한 법원의 태도도 다르지 않았습니다. 제가 보석으로 풀려난 지 한 뒤인 지난 5월 31일, 서울고등법원 형사 합의7부는 용산 철거민들에 대한 항소심 선고를 내렸습니다. 지방선거 이틀을 앞두고 내려진 선고에서 재판부는 철거민 7명에게 징역 4년에서 5년씩을 선고했습니다. 불구속자 2명에 대해서만 집행유예를 선고했습니다. 재판부의 판단은 1심 선고 때와 똑 같았습니다. 검찰이 제출하지 않았던 수사기록을 제출한 뒤에도 1심 선고 때와 같은 논리로 일방적으로 철거민들의 유죄만 확인하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다만, 1심 때보다는 형량을 1년씩 줄여주었을 뿐입니다.

 

항소심 재판부는 경찰의 진압작전이 문제가 있음을 지적했습니다. “진압작전의 준비가 미흡했고, 실행에서 주도면밀하지 못했으며, 2차 진입 결정에서 신중하지 못해, 전격적으로 이루어졌다고 볼 여지가 충분히 있으며, 철거회사 직원이 소방호수로 물을 뿌리는 것을 방치하는 잘못을 범하기도 했다.”고 지적하면서도 불법은 아니라는 논리로 철거민들에게 유죄를 선고했습니다. 그 부족한 점으로 인해서 철거민 5명과 경찰관 1명이 사망했는데도 말입니다. 또 화염병이나 유류가 가득한 망루를 진압하기 위해서는 화염병 등이 소진될 때까지 기다리다가 진압해야 안전을 보장할 수 있다는 경찰의 시위진압 매뉴얼을 어긴 것에 대해서도 “지침에 불과한 매뉴얼을 지키지 않았다고, 진압이 위법하다고 할 수 없다”고 판단했습니다. 결국 경찰의 모든 행위는 부족하고, 매뉴얼을 어겼다고 해도 적법한 것이라는 판단이었습니다. 이에 따르면 당연히 적법한 공권력의 행사에 저항한 철거민들이 범죄를 저지른 것이 됩니다. 정당방위로도 볼 수 없다는 것, 그렇다고 한다면 앞으로 공권력에 저항하는 모든 행위는 불법이 될 수밖에 없다는 무척이나 무서운 논리인 것입니다.

 

또 재판부는 진압에 투입된 특공대원들이 “화염병 던지는 것을 보지 못했다”고 한 법정에서의 진술은 무시하고, “화염병을 못 봤다고, 화염병 투척사실이 없다고 단정할 수 없다”면서 발화원인에 대한 구체적인 증거 없이 정황적으로 화염병일 것이라고 판단했습니다. 농성 중이던 철거민들 어느 누구도 화염병을 던지지 않았고, 당시 계속 쏘아댔던 물대포로 인해서 화염병의 심지는 불을 붙일 수 없게 젖어 있었으며, 그들은 모두 4층으로 올라가 바깥쪽으로 얼굴을 내밀고 숨쉬기에도 정신이 없었다는 진술은 철저하게 무시되었습니다. 그래서 농성 중이던 철거민들은 자신을 포함한 동료들이 죽을 줄 알면서도 유류가 바닥에 질펀하게 깔렸고, 유증기가 가득 찬 망루에서 화염병을 던졌다는 것입니다. 결국 재판부의 판단대로라면 철거민들은 자폭 테러를 할 정도의 극단적인 폭력배가 되는 것입니다. 자신이 죽을 수도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말입니다. 이런 어이없는 판결을 재판부가 내린다는 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 공판중심주의의 정신은 온 데 간 데 없었습니다.

 

또 재판부는 “우리의 경제 질서는 자본주의와 시장경제질서를 기본으로 하면서, 예외적으로 국가가 개입”한다면서 이러한 경제 질서 하에서 “시장에서 자신이 한 선택에 대한 결과는 스스로 책임지는 것이 원칙”이라고 강변했습니다. 그러면서 “이사를 않고 재개발구역에 남아 장사를 계속하는 쪽으로 선택”했고, “진압잔적 개시 시 끝까지 저항하는 것을 선택”한 것은 철거민들이라며, 철거민들이 자신들의 선택에 책임을 져야 한다고 판결했습니다. 재개발 현장에서 쫓겨나지 않고 남아 있던 모든 행위도, 살인적인 진압에 저항한 것도 오로지 철거민들의 선택이므로 책임은 그들에게 있다는 이 논리 앞에서는 할 말을 찾을 길이 없습니다.

사법부의 판단이 이 정도라면 법은 이미 사회적 약자들에게는 폭력수단일 뿐입니다. 법치가 이루어지려면 법이 정의에 입각하여 제정되어야 하고, 법 적용도 정의롭게 되어야 합니다. 하지만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 같은 이는 국가경제에 막대한 지장을 주는 엄청난 범죄를 저질렀어도 그는 감옥에 가지 않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지난 해 연말에는 단독 사면을 받기까지 했습니다. 그에 비하면 수만 분의 일에도 못 미치는 피해를 끼친 철거민들, 더구나 자신들의 권리를 찾기 위해 저항했던 철거민들은 감옥에 갇히고 중형을 선고받았습니다.

 

항소심 판결과 함께 김석기 등 진압 책임자들에 대한 재정신청 사건도 기각되고 말았습니다. 다만 지난 6월 24일에 헌법재판소는 용산참사에서 생존한 철거민들의 이름으로 “검찰의 수사기록 공개 거부는 헌법상 보장된 기본권을 침해하는 것”이라며 낸 헌법소원을 받아들여 위헌을 선고했습니다. 이 결정에서 헌재는 “법원이 수사 서류에 대한 열람과 등사를 허용하라고 결정했는데도 검사가 이를 거부한 것은 피고인이 신속하고 공정하게 재판을 받을 권리와 변호인의 도움을 받을 권리를 침해한 것”이라며, 위헌을 선고한 것입니다. 이미 1심 선고가 수사기록이 제출되지 않은 상태에서 내려졌고, 항소심에 들어와 수사기록이 제출된 상황에서 판결까지 이루어진 다음에 나온 헌재의 결정인지라 재판에 미칠 실효성은 없었습니다.

 

마지막으로 남은 것은 대법원이었습니다. 우리나라 최고의 법원인 대법원의 판단은 법의 제정과도 같은 효력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하급심의 잘못된 법리적용을 바로 잡아줄 것이라는 실낱같은 기대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지난 11월 11일 열린 대법원 판결에서는 대법원은 이와 같은 기대를 헌신짝처럼 내던졌습니다. 하급심처럼 구체적인 증거가 없어도 망루 농성 철거민들이 화염병을 던져서 화재가 났고, 그로 인해 사망사건이 발생했고, 경찰의 안전대책은 미흡했지만 그렇다고 법의 보호를 받지 못할 정도가 아니었으니 철거민들의 저항은 불법행위라고 했습니다. 어떻게 이런 판결이 대법원에서조차 하나도 시정되지 않고 되풀이되는지 저는 인정할 수 없습니다. 결국 지배계급의 입장에서, 지배적인 질서를 더욱 강화하기 위한 입장에서 사법부가 판단하고, 움직인다는 명백한 증거를 그날 우리는 보았습니다. 이제 아무리 부당한 법집행이라고 해도 이에 저항하는 민중들은 한낱 불법 폭력세력으로 규정될 것이고, 잔인한 진압은 정당화될 것입니다. 대법원을 비롯한 사법부는 국가폭력을 제어하고, 우리 사회의 인권과 민주주의를 바로 세울 중요한 계기를 외면하고, 국가폭력의 한 구성분자로 자신들의 자리를 스스로 매겼습니다.

 

이런 법 앞에서 절망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사법부가 진실의 일단이라도 밝혀주기를 바랬던 이들은 좌절했습니다. 도대체 경찰에게만 면죄부를 주는 사법부를 어떻게 신뢰할 것입니까. 구속자 가족들은 울부짖었습니다. 해도 너무 하는 것 아니냐면서 울분을 토해냈습니다. 어린 아이들 곁으로, 그리고 아내와 부모들이 기다리는 가정으로 돌아가려면 앞으로도 3년, 4년을 더 감옥에서 지내야 하는 이들의 가슴은 타들어갑니다. 가장 없이 생계는 어떻게 유지할 것이며, 아빠를 찾는 아이들에게 뭐라고 답해줘야 하는지 남은 가족들은 울기에도 지쳤습니다.

 

 

용산투쟁에서 새로운 희망을 보았습니다.

 

재판장님, 저에게 용산은 아직도 진행형입니다. 아니 아직도 많은 사람들에게 용산은 계속되고 있습니다. 유가족이 그렇고, 구속자와 그 가족들에게 고통은 계속되고 있습니다. 용산4구역의 철거민들이나 전철연(전국철거민연합)을 비롯한 전국의 철거민들의 고통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생명평화미사를 현장에서 열었던 신부님들은 매월 한 차례씩 미사를 이어가고 있고, 문화예술인들은 전시회와 북콘서트 등으로 용산을 잊지 않기 위해 애를 쓰고 있습니다. 용산범대위는 해소되었지만, ‘용산참사 진상규명 및 재개발제도 개선위원회’가 새롭게 정비되어 이후 사업을 도모하고 있습니다.

 

용산참사가 났던 지난해는 유난히 거물급 인사들이 많이 돌아가신 해였습니다. 2월에는 김수환 추기경이 돌아가셨고, 5월에는 노무현 전 대통령이, 8월에는 김대중 전 대통령이 국민들의 애도 속에 장례를 지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줄을 길게 늘어서서는 이들의 가는 길을 배웅했습니다. 그렇지만 용산철거민들은 그렇게 광장에서, 수많은 인파들의 애도를 받지는 못했습니다. 그렇다고 고인이 된 용산철거민들과 용산4구역을 지키던 생존 철거민들이 외로웠던 것만은 아닙니다.

 

천주교 사제들을 비롯한 기독교, 불교 성직자들의 계속된 연대가 있었고, 이들을 따라서 신도들이 함께 했습니다. 작가, 미술인, 음악인, 연극인 등 문화예술계의 젊은이들을 중심으로 현장에서 문화행동이 이어졌고, 이들의 노력으로 참사 현장이 문화예술 공간으로 거듭났습니다. 미디어행동에 결합한 활동가들은 라디오방송을 내보내고, 용산문제를 알리기 위한 다각적인 노력을 경주했습니다. 야4당 공동위원회를 구성했던 정치인들도 꾸준히 용산참사를 해결하기 위한 활동을 벌였습니다. 변호사들도 치열한 법정공방을 이어갔고, 심지어는 기자회견에서 연행되기도 했습니다. 인권활동가들은 진상조사와 국민법정 활동을 비롯해 국제사회에 이 사안을 알리는 역할을 해냈습니다. 거기에 1년 동안 단체 일을 접고 헌신적으로 결합했던 상황실을 비롯한 용산범대위의 대표와 활동가들이 있었습니다. 촛불 네티즌들도 전국에서 패널 선전전 활동 등 용산을 알리는 역할을 톡톡히 해냈습니다. 그리고 이름도 없이 말없이 용산투쟁을 지지했던 많은 이들이 있었습니다. 용산에 일이 있다면 만사를 제치고 달려왔던 그들은 자발적으로 성금도 모아주었습니다. 짧지 않은 시간 동안 자발적으로 이루어진, 그리고 끊임없이 지속된 이런 활동들이 있었기에 무시와 고립으로 일관했던 정부를 협상테이블에 끌어낼 수 있었습니다.

 

돌아보면 용산은 우리사회의 불편한 진실을 정면으로 응시하게 만드는 곳이었습니다. 아파트 공화국에서 투기로 한몫 잡고 싶은 욕망을 가진 이들에게 그 욕망이 결국 사람을 죽게까지 한다는 진실을 보도록 만드는 곳이 용산이었습니다. 우리 사회의 민주주의가 국가 공권력의 폭거 앞에 일순간 무너져 내릴 수 있음을 웅변하는 곳이 용산이었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민주주의는 철거민을 비롯한 사회적 약자들이 배제된 민주주의였으며, 잘못 설계된 민주주의였고, 사실은 민주주의 기본도 제대로 세우지 못했음을 뼈저리게 말해주던 곳이 용산이었습니다.

이런 현실에서 용산은 가난한 사람들은 가난한 사람들끼리 연대를 통해 서로 끌어안고 가야 함을 적나라하게 보여주었습니다. 신자유주의 야만이 횡행하는 시대에 부자들만을 위한 정책을 추구하는 정부가 들어서 있는 시대에 가난한 이들의 작은 권리 하나라도 쟁취하기 위해서는 가난한 이들끼리 연대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교훈을 남겼습니다. 그리고 그런 연대가 이루어지면 쉽게 꺼질 수도, 쉽게 잊힐 수도, 쉽게 저버릴 수도 없는 힘이 생긴다는 것을 보여준 것 또한 용산이었습니다. 용산을 덮으려고 발악을 했던 정권의 탄압을 이기고 꾸역꾸역 용산으로 모여들었던 마음이 가난한 이들을 저는 잊을 수 없습니다. 그들이 있기에 저는 수배생활을 이겨낼 수 있었고, 감옥 수감생활을 견뎌낼 수 있었습니다.

 

 

이 법정만큼은 진실의 편에 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재판장님, 저는 굳이 검찰의 기소 내용을 반박하지는 않겠습니다. 이미 변호인들의 변론에서 충분히 검찰 주장의 부당성이 증명되었기 때문입니다. 다만 비폭력불복종운동을 신념으로 안고 살아온 인권활동가에게 폭력시위 혐의를 뒤집어씌우려는 가당찮은 검찰의 의도에 분노할 뿐입니다.

 

마지막으로 이 법정만큼은 진실을 외면하지 않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현실의 모든 법정들이 진실을 외면해서 불구덩이에서 살아남은 이들에게 모두 유죄를 인정하는 불의의 편을 든다고 해도, 이 법정만큼은 용산의 진실을 외면하지 말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국가폭력에 의해 국민의 생명이 죽어갔다는 사실에 대해 외면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그것은 저의 무죄를 재판부가 선고해달라는 것이 아니라 저의 잘못을 따질 때에 용산에서 억울하게 죽어간 이들을 외면하지 말아달라는 부탁입니다. 세상에 사법부의 일각에서라도 진실을 말하는 이가 있음을 정말 보고 싶기 때문입니다. 지금까지 절망만 해온 용산 관련한 법원의 판결과는 결이 다른 희망을 보고 싶기 때문입니다. 가난한 자, 힘없는 자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는 법정이 있음을 보고 싶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지금까지 저를 변호하기 위해 애써온 변호사들에게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수배와 구속을 같이 감내하면서 고통을 이겨준 사랑하는 아내와 두 딸에게도 고마움을 표하고 싶습니다. 저의 활동을 지지하고, 함께 해준 인권운동사랑방과 인권재단 사람의 활동가들과 관계자들, 그리고 용산범대위의 모든 분들과 유가족, 전철연의 동지들에게도 고마움을 전하고 싶습니다. 또한 공범이 되어 이 법정에 서 있는 이종회 선배에게도 고마움을 전합니다.

 

재판장님, 저는 최후진술을 이제 마치려 합니다. 지금까지 저의 재판에 진정으로 임해주신 점에 대해 감사드립니다. 저는 진실은 반드시 승리한다는 믿음으로 앞으로도 용산의 진실을 밝히기 위해 싸워갈 것입니다. 역사의 법정, 정의의 법정은 반드시 용산참사가 국가폭력에 의한 것이며, 그 국가폭력에 저항한 철거민들의 투쟁은 정당했다고 판결할 것이라고 믿습니다.

 

끝까지 다소 장황한 저의 최후진술을 읽어주신 점에 감사드립니다.

 

2010년 11월 25일

 

피고인 박래군

 

 

 

서울중앙지방법원 제12단독 재판부 귀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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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래군 집행위원장은 용산범대위 집행위원장으로 활동했다는 이유로, 검찰에서 지난 11월 25일 5년 형을 구형하였습니다. 

오는 12월 28일 1심 판결을 남겨두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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