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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산 전시] 미영씨가 절대 안 시킨 전(8/15~1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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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8.18 17:1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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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영씨가 절대 안시킨 展
용산참사, 진실을 위한 싸움은 끝나지 않았다
 
2012_0815 ▶ 2012_1015
주말(토,일요일) 공휴일 휴관 /  관람시간 11:00am~08:00pm

장소 : 서교동 룰루랄라
 
 주최: 한국민예총 / 용산참사진상규명위원회 
 
 
● 참여작가
 
김기호/김재석/나규환/노순택/문정현/박상덕/박정신/배인석/설총식/성효숙/송효섭/신유아/신주욱/안만욱/윤후명/이안수/이원석/이윤엽/이윤정/이철재/이하/전미영/전진경/정찬일/정택용/정윤희/천호석
 
 
 
 
<리얼 디스토피아, ‘멋진 신세계’는 없다!>
 
 
_김종길 미술평론가
 
 
토건국가를 넘어서 ‘돌봄 사회’로 가자고 주장하는 조한혜정은 『다시, 마을이다』(2007)에서 아이들이 행복하게 ‘서식’하는 생태계를 소망하며, 그것이 어떻게 실천될 수 있는지 찾고 있다. 그는 한국사회가 온통 ‘건설의 덫’에 걸려 있다고 진단하면서 배려와 돌봄과 신뢰와 사랑의 공간이 안정적으로 마련되어야 한다고 통박한다. 
 
헬레나 노르베리 호지는 인류의 대안문명을 서부 히말라야 고원의 황량한 마을 라다크에서 찾았다. 그는 “물질적으로 풍족하지는 않지만 아무도 가난하다고 느끼지 않고, 긴밀한 가족 공동체적 삶속에서 사람들이 정서적․심리적으로 안정을 누리며, 여성들과 아이들과 노인들이 존경받는 사회”가 우리의 대안이라고 주장했다. 호지는 마천루가 즐비한 뉴욕이나 동경, 런던과 서울의 도시 문명이 미래문명의 대안이 될 수 없다고 단언했다. 
 
도시는 근원적으로 반생태적 가치들을 양산할 수밖에 없는 구조를 가지고 있으며, 우정과 환대를 비켜서는 이율배반의 고립지대를 형성한다. 만약 정부가 근원적이며 본래적인 태도로 생명의 생태도시를 지향한다면, 과시와 업적의 유통기한을 위한 불도저식 개발욕망을 내리고 공동체의 생태적 삶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그러나 그 길은 너무도 멀어 보인다. ‘1․20용산참사’는 극명한 사례다. 
 
 
용산참사가 터졌다. 용산구 한강로 2가 건물 옥상에서 점거농성을 벌이던 세입자와 ‘전국철거민연합회’ 회원들은 경찰특공대와 용역의 강제진압에 맞섰고, 이 사건으로 철거민 5명과 경찰 1명이 목숨을 잃었다. 참사는 겨울철 강제철거가 주된 요인이었다. 겨울에 철거를 강행하는 것은 철거민들의 현실을 벼랑 끝으로 내 모는 것과 다를 바 없다. ‘UN사회권규약위원회’는 퇴거를 당하는 사람들이 원치 않을 경우 겨울철과 같은 악천후에는 퇴거를 수행해선 안 된다고 명시하고 있으며, 서울시도 겨울철 강제철거를 금지하는 행정지침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경찰은 정당한 법집행이었음을 강조하고, 여당은 철거민을 테러리스트로 못 박았다. 2월 10일 김석기는 사퇴 기자회견에서 “불법에는 강한 경찰, 선량한 시민에게는 더 없이 친절하고 따듯한 경찰”의 실천을 아쉬워했으나, 그가 마지막으로 한 행동은 경찰특공대 대원들에 대한 격려였다. 이것이 끝없는 현실의 얼굴이다.
 
 
이 짧은 참조 글에 새겨진 폭력의 언어들을 직시해 보라. 철거, 경찰특공대, 용역, 강제진압, 강행, 벼랑 끝, 퇴거, 겨울철, 악천후, 수행, 법집행, 그리고 테러리스트. 이 언어에 맞서는 것은 권력에 맞서는 것이며, 이것은 그들의 적이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들에게 이 적은 타협과 배려의 대상이 아니라 ‘진압’의 대상이고, ‘싹쓸이’로 밀어버려야 할 ‘쓰레기들’이다. 그러므로 ‘1․20용산참사’는 재해적 의미가 다분한 ‘참사’가 아니라 ‘학살’이라 할 수 있다. 
 
당시 이철성 영등포 경찰서장은 “1980년대에는 솔직히 백골단 등이 투입돼 심하게 시민을 진압하고 폭력적인 방법도 동원하고 그랬는데 요즘은 누가 그러느냐”고 반문하면서도 “차라리 전쟁 상황이라면 마음껏 진압했을 텐데 그럴 수 없으니 우리로서도 답답하다.”고 말했다. 어안을 벙벙하게 만드는 이 공포의 언술은 경찰이 민중을 ‘적’으로 간주한다는 명백한 증거다. 
 
실체의 적과 전쟁을 수행하는 동안이라 할지라도 군인이 아닌 민중은 중립공간에서 보호받을 권리를 가진다. 이 땅의 민중이 자본과 권력을 향해 저항하는 것은 민중 자신이 그것들로부터 상식의 일상조차도 무시당하거나 최소한의 자존을 침해당할 때이며, 생존에 대한 위협이 직접적일 때이다. 경찰의 존립이유는 위험사회의 조장과 그 주체에 있지 않다. 그들은 어떠한 상황에 직면할지라도 민중의 편에서 문제를 직시하고 권력에 중재하는 ‘시민경찰’이 되어야 한다. 그러나 이 시대 한국경찰은 완전한 권력의 시녀로 추락했고, 죽임의 폭력을 도구화 한 마구니들이다. 
 
예술행동주의는 제도와 권력, 악의적 법이 실행하는 파괴적 문명화를 안티테제로 내재화하여 그 거름의 자양분으로 키운 실천의 나무이며, 꽃이다. 우리는 이 예술의 이름으로 파괴의 문명을 생명의 문명으로 전환시킬 수 있고, 미래세대를 위한 예지적 전망을 타전할 수 있다. 하여, 예술행동주의가 발산하는 미적 이미지와 에너지는 고정되거나 관념화되기 이전의 상태로서 개념 전야의 혼돈을 보여주는 역동과 ‘엇’의 미학이며, 분열과 통합이 어그러진 ‘개체-융합’의 마당 굿이다. 
 
오늘 우리가 펼치는 이 전시는 디스토피아의 상징투쟁이자 끊임없이 강제당하는 현실에 대한 ‘현실투쟁’이며, ‘멋진 신세계’ 대한민국을 유포하는 이 정부의 허위 정책과 파괴책동에 대한 생생한 고발이다! 그리고 우린 다음과 같은 말로 그들에게 소리칠 것이다!
 
“아수라의 ‘까쇠’들이여, 죽임의 굿판을 걷어치워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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