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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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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언제 돈과 권력 없는 사람들이 법의 보호를 받을 수 있을까?

작성일
2010.08.17 10:3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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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경남은 무죄다”

[기고] 언제 돈과 권력 없는 사람들이 법의 보호를 받을 수 있을까?

민중언론 참세상 http://www.newscham.net/

 

이광일(진보평론 편집위원) 2010.08.17 08:06

 

8월15일 ‘해방의 날’을 보내며 이런 질문을 해봅니다. 이 세상 어디를 가야, 돈과 권력 없는 사람들이 법의 보호를 받으며 인간다운 삶을 살 수 있을까요. 하지만 이런 질문이 무색하게 어디를 가든 그들은 항상 법의 외부에 있습니다. 철이 든 이후에는 ‘모든 이가 법 앞에 평등하다.’는 말을 믿은 적이 없지만, 그래도 그 법을 가지고 가난한 자들의 삶을 더 파괴하고 그들을 절망에 빠뜨리는 자들을 보면서, 인간에 대한 연민과 함께 그런 현실에 분노를 느끼는 것은 어쩔 수 없습니다.

 

‘주어진 해방’이든, ‘민족해방투쟁의 결과’이든 그 이분법의 논의를 떠나 ‘8.15 해방의 날’을 기념하여 특사로 풀려난 자들의 이름이 적힌 목록을 대강 살펴보십시오. 그들 대부분은 상층권력과 거대자본을 상징하는 인격이거나 혹은 그 주변에서 숨 쉬고 있는 자들입니다. 이에 대해 법무부관계자는 이번 특사가 ‘경제발전과 사회통합’을 위한 것이라 합니다. 그런데 그 목록에서 가난한 자들, 그들과 함께 한 이들의 낯선 이름은 거의 찾아 볼 수 없습니다. 아마도 그들은 경제발전에 도움이 되지 못한, 그렇기에 사회통합의 대상이 될 수 없는 그런 군상들로 간주되고 있기 때문이겠지요.

 

하지만 역설적으로 이런 현실을 보면서 그나마 위안을 받습니다. ‘해방의 날’에 이루어지는 ‘그들만의 빅 이벤트’가 해방과 건국의 과정이 바로 그들의 욕망을 위한 것이었음을 다시 한 번 음미, 확인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 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주기적으로 행해지는 그런 이벤트는 진정 이 땅에서 열심히 노동하는 가난한 이들에게는 ‘아름다운 조국’이 있을 수 없음을, 잊을만하면 되새겨 주는 알람시계와 같은 서비스를 해주니 고맙기도 합니다. 그렇기에 이 사회에서 ‘주권자이기도 한 가난한 자들의 존재와 삶’은 항상 주변으로 밀려 배제와 억압, 착취와 수탈의 대상이 되고 있는 것이겠지요. 그렇기에 새삼 ‘무전유죄 유전무죄’라는 그 누군가의 외침을 떠 올릴 필요도 없습니다. 그들에게 그것은 너무 친숙한 삶의 일부이니까요.

 

혹시 용산을 기억하시나요. ‘자본가들의 대박축제’라고 일컬어졌던 용산역세권개발이 난항에 부딪혔다는 소식은 들었다구요. 그래서 그런가요. ‘용산학살’과 관련, 철거민들의 아픔을 함께 하며 투쟁했다는 이유로 전철연 의장인 남경남씨에게 징역7년이 선고되었다고 합니다. 재판부는 남 의장이 개인적 영달을 위한 것이 아니라 철거민들이 강제로 이주당하는 것에 맞서 그들과 함께 한 점을 인정했지만, 법치주의의 근간을 흔드는 행동을 한 것은 그에 상응하는 처벌을 받아야한다며 그와 같은 형량을 선고했다고 합니다. 이 기사를 접하는 순간 눈물이 핑 돌았습니다.

 

‘눈물’을 흘렸다고 하니 괜히 무섭다구요. 너무 과민반응은 하지 마십시오. 자본과 권력을 대표하는, 이른바 이 땅의 엘리트들이 그 누군가의 꿈과 희망을 자기 것으로 가로채기 위해 흘리는 ‘악어의 눈물’은 아니니까요. 새삼 ‘이제는 가난한 이들에게는 서로 도울 권리마저 없구나.’라는 생각이 들어 저도 모르게 나온 눈물입니다. 자신들의 존재와 삶 자체를 부정하는 썩어문드러진 관계들 속에서도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이란 그저 ‘무전유죄, 유전무죄’를 읊조리며, 아무 말 없이 죽어가는 것이라고 친절하게 가르쳐주는, 그것도 법의 이름으로 강제하는 이 기막힌 현실 때문에, 그래서 무언가 모를 설움에 나온 눈물입니다. 같은 처지임에도 옆에서 불구경하듯 쳐다보다가 언젠가 자신의 차례가 오면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커다란 눈만 껌벅이는 소처럼 그냥 죽을 것을 강요하는 그런 현실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만일 이 땅의 철거민들이 자본과 권력이 하자는 대로 했다면, 혹시 투철한 준법정신의 발현이라며 이 ‘법치국가’는 그들에게 조그만 훈장이라도 달아주었을까요. 청계천에서 광주대단지로의 ‘이주’로 시작된 그들의 고단한 인생유전이 과연 끝날 수 있었을까요. 어디 철거민들뿐입니까. 삶을 위해 오랜 노숙투쟁을 이어온 기륭전자, 동희오토의 노동자들이, 지금도 낯선 국경을 넘나들며 투쟁하는 콜텍노동자들이 그렇게 하지 않는다고 자본이 어디 그들에게 개떡 하나라도 더 주었을까요. 오히려 자존심도 없는 놈들이라고 비아냥거리며 더 짓밟았겠지요. 지금 이 순간 저들이 그들에게 하고 있는 짓들을 보면 상상하고도 남음이 있습니다. 그렇기에 그래도 자칭 ‘지식인’이라고 글을 쓸 때는 나름대로 표현의 수위를 조절하려 애를 쓰는데, 오늘은 꼭 이 말을 하고 싶습니다. ‘개 같은 세상’입니다. 이 말을 내뱉는 순간 한 때는 꿈이기도 했던 시인이 되지 못한 것이 후회가 됩니다. 시인의 가슴과 입술은 모든 것을 향기롭게 만든다고 하기에 더욱 그렇습니다.

 

도대체 ‘법치주의의 근간’은 무엇입니까. 모든 이들에게 은혜로운 법조문 그 자체를 암송하고 떠받드는 것입니까. 하지만 그 법조문은 비대칭적이고 부당한 사회관계들을 매개로 해서만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기에 가난한 이들에게는 항상 외부에 존재하는 낯선 이물질, 두려움의 대상일 뿐입니다.

 

그렇기에 모든 이들에게 은혜로운 그 법조항의 실현을 부정하는 그 부당한 사회관계들, 따라서 그에 내재한 부당한 권력관계들을 문제시하면서 그것을 해소, 극복하기 위해 비판, 저항, 투쟁하는 이들이야말로 진정 법치주의의 근간을 온몸으로 지키는 이들 아닌가요. 그들의 행위야말로 그 인식 여부를 떠나 ‘은혜로운 법조문과 부당한 현실’ 사에 놓인 넓은 간격과 높은 장애를 좁히고 허물리기 위해, 즉 ‘화석화된 법치주의’에 끊임없이 생동감을 불어넣는, 진정 삶이 무엇인지 아는 이들 아닙니까. 그렇기에 만일 법의 존재이유가 사회구성원의 온전한 삶의 유지와 지속에 있다면, 그것을 부정하지 않는다면 그러한 행위의 의미를 깊이 숙고하지 못한 채 단죄하는 것만큼 법치주의에 반하는 것이 이 세상 어디에 또 있겠습니까. 지금 법은 법을 부정하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말합니다. 남경남은 ‘무죄’입니다. 오히려 공적인 권력을 이용해 사적 권력의 제고와 부 등 각종 이득을 취하는, 동네 양아치보다 못한 품격을 갖춘 자들을 옹호하며 ‘해방의 날’을 빙자하여 특별사면시키는 정치권력이야말로, 다른 한편 권력분립이라는 이유를 들어 그러한 정치권력들의 행위에 눈감고 오히려 가난한 자들의 마지막 삶의 숨통을 죄는 사법부 당신들이야말로 유죄입니다. 당신들이 전가의 보도처럼 품고 있는 그 은혜로운 법조문이 아니라 항상 그 법의 외부에 버려져 있는 벌거벗은 주권자들의 눈물겨운 삶들은 지금 당신들이 유죄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들리십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