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 6, 29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 사도 대축일
“사람의 아들을 누구라고들 하느냐?”
“세례자 요한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엘리야라 하고, 또 어떤 이들은 예레미야나 예언자 가운데 한분이라고 합니다.”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스승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
2000년 사도들에게 당신을 누구라고 생각하는지 물으셨던 예수님께서 오늘 우리에게도 똑같은 질문을 던지십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루카 4,18ㄹ) 가난한 사람들에게 하느님의 나라를 선물로 주시며 축복하신(루카 6,20 참조) 예수님께서 물으십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부자들의 노예가 된 이 정권은 대답합니다. 이곳 용산에서 삶의 자리를 지키고자 했던 가난한 이웃들을 참혹하게 죽이고 감옥에 가둠으로써. 재벌의 죄악에 눈감고 부유한 이들에게 특혜를 부여하면서, 서민들에게 경제 불황의 고통을 지움으로써. 800만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보잘것없는 삶의 터전조차 빼앗으려 함으로써. 가난한 사람들을 향한 예수님의 축복은 부자들만의 정권의 저주로 바뀌고, 가난한 이들의 벗이었던 예수님은 더 이상 발붙일 곳조차 없어졌습니다.
그러나 이 자리에 함께 있는 우리는, 온 나라 곳곳에서 부자들만의 정권을 향해 불같이 외쳐대는 모든 선한 이들은 온 몸과 마음으로 대답합니다. 가난한 이들에게 자행되는 온갖 불법적인 폭력에 맞서 몸 방패가 됨으로써, 피눈물로 얼룩진 가난한 벗들의 얼굴을 따스한 손길로 어루만져줌으로써, 차가운 세상 속에 묻혀 삭으러드는 가난한 벗들의 처절한 외침에 파도와 같은 큰 함성으로 함께 함으로써, 예수님께서 진정 가난한 이들의 벗이라고 고백합니다.
율법의 참 뜻을 왜곡하여 사람들을 얽어매는 굴레로 만들어버린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을 준엄하게 비판하시면서(루카 11,37-54 참조), 구체적인 예로써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 있음을 가르치신 예수님께서 물으십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자신을 선택해준 국민들의 소중한 뜻을 저버리고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려는 이 정권은 대답합니다. 다섯 분의 가난한 형제들과 상관의 명령에 따라 강제 진압에 동원된 힘없는 경찰 한 분을 불구덩이 죽음으로 몰고 간 무자비한 철거로써. 보통 사람으로서 사람 사는 세상을 일구고자 했던 힘없는 전직 대통령을 죽음으로 몰아간 검찰의 표적 수사로써. 민주주의의 기본인 집회결사의 자유를 법의 이름으로 억압함으로써. 정의를 외치는 선량한 시민들을 방패와 몽둥이로 짓밟는 소위 공권력의 행사로써. 하느님의 모상대로 창조된 사람들을 위한 법이 이제는 사람답게 살려는 이들을 잡는 법으로 둔갑했고, 이 정권은 잘못된 법과 그 집행에 아무 말 하지 말고 그저 무릎 꿇으라고 강요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자리에 함께 한 우리는, 온 나라 곳곳에서 불의한 정권을 향해 불같이 외쳐대는 모든 선한 이들은 온 몸과 마음으로 대답합니다. 몽둥이에 맞아 피멍이 들고 방패에 찢겨 피를 흘리면서도 정의를 위해 끝없이 모임으로써, 부당한 권력의 협박에도 굴하지 않고 악법으로 고통 받는 형제들과 함께 함으로써, 자신의 삶의 자리에서 안하무인인 정권의 참된 속죄와 국민의 정부로 거듭남을 위해 기도함으로써, 예수님께서는 정의의 그리스도라고 고백합니다.
산과 들, 호숫가, 집과 거리에서 모든 이들과 어울려 소통하여,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고 참 행복에 대해서 가르치심으로써 분열과 갈등을 넘어 일치와 화해를 이루셨던 예수님께서 물으십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국민의 지지로 권력을 잡은 이 정권, 그러나 계속되는 그릇된 정책 수립과 집행으로 대다수 국민의 지탄을 받게 된 이 정권은 대답합니다. 작년 촛불정국에서 우스꽝스러운 모습을 드러내었던 이른바 명박산성을 통해서. 인터넷 감시, 공영방송인 MBC에 대한 무차별적인 공격, 조중동과의 밀착, 신문방송법 등 이른바 엠비악법 등을 통한 언론통제 시도 등 국민들과의 진정한 대화를 거부하고, 국민의 뜻을 헤아리기보다는 일방적으로 자신들의 입장을 관철시키려는 독선적인 모습으로 분열과 갈등을 초래하고 있습니다. 또한 10년 동안 이루어온 남북 간의 값진 화해의 분위기를 불과 일 년 반 사이에 극도의 적대적인 관계로 변질시켜 버렸습니다.
그러나 이 자리에 함께 한 우리는, 온 나라 곳곳에서 귀를 막고 대화를 거부하는 정권을 향해 불같이 외쳐대는 모든 선한 이들은 온 몸과 마음으로 대답합니다. 공영방송을 지키려는 지난한 몸짓을 통해서, 왜곡보도를 시정하려는 힘찬 노력을 통해서, 각계각층에서 봇물처럼 일어나고 있는 시국선언을 통해서 국민의 참소리를 벽창호 같은 정부 당국에 강력하게 알려 참된 소통을 이루려 쉼 없이 노력함으로써, 북한 동포에 대한 인도주의적 지원을 강력히 요구함으로써 예수님께서 화해와 일치의 그리스도라고 고백합니다.
들꽃과 새들처럼 보잘것없는 피조물조차 정성껏 돌보시는 창조주 하느님을 찬미하며 세상 걱정에 앞서 하느님 나라를 추구하라(루카 12,22-32 참조) 가르치신 예수님께서 물으십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무차별적 개발 논리에 노예가 된 이 정권은 대답합니다. 경인운하과 대운하 사업의 다른 얼굴인 이른바 4대강 살리기 사업으로 어머니 대지를 유린하여 가시적인 업적을 쌓고, 소수의 개발업자들을 배불리겠다고, 우리 모두의 삶의 터전이자 후손들에게 고이 물려주어야 할 하느님의 선물인 자연을 자신들의 전유물로 착각하고 자기 멋대로 처분하겠다고, 그리하여 스스로 창조주의 자리에 오르려 합니다.
그러나 이 자리에 함께 한 우리는, 온 나라 곳곳에서 하느님의 자리를 차지하려는 오만하고 불경한 정권을 향해 불같이 외쳐대는 모든 선한 이들은 온 몸과 마음으로 대답합니다. 절대로 이 땅이 처절하게 찢기는 상황을 좌시하지 않겠다고, 창조주께서 주신 것을 원래의 아름다운 모습으로 보전하겠다고, 그리하여 예수님께서 창조주 하느님의 외아들이심을 고백합니다.
참으로 오랜 시간 우리는 이 자리를 지키고 있습니다. 유가족들과 사제들이 수시로 폭행을 당하고 있습니다. 언제 또다시 정권의 폭력에 의해 짓밟힐지도 모릅니다. 언제 어떻게 이 자리가 끝날지 모릅니다. 허탈함과 슬픔과 분노로 시작한 이 자리, 하지만 이제 이 자리는 서서히 기쁨과 희망의 자리로 변하고 있습니다. 정권을 향한 우리의 진심어린 충고가 받아들여졌기 때문이 아니라, 이 자리에 함께 한 우리가 절망의 상황에서 무기력했던 모습을 뒤로하고 서로가 서로를 보듬으며, 작은 하나가 모여 둘이 되고 이제 세상 어느 권력도 깨뜨릴 수 없는 큰 하나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 시대는 진정 예수님께 대한 우리의 신앙을 입이 아니라 삶으로 고백하라고 요청하고 있습니다. 옆에 계신 분들을 보십시오. 삶으로 믿음을 고백하는 우리의 자랑스럽고 사랑스러운 벗이요 동지들입니다. 이렇게 함께 하기에 우리 각자는 약하지만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이렇게 함께 하기에 우리는 힘겨운 삶 안에서 무릎 꿇지 않습니다. 이렇게 함께 하기에 우리는 슬픔 속에서 기쁨을 누립니다. 여기 함께 모인 우리가 누리는 기쁨과 희망이 널리 널리 모든 이에게 퍼져나가길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