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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책위상황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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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9일 민중열사 영결식, 노제 유가족 인사

작성일
2010.01.10 20:09:34
조회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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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mbout.jinbo.net/webbs/view.php?board=mbout_15&id=165

영결식 유가족 인사: 고 이상림 열사 부인 전재숙 여사

 

안녕하세요, 저는 고 이상림씨의 처 전재숙입니다. 이렇게 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서울역광장을 가득 메워주신 여러분께, 다섯 유가족을 대표해서 인사드립니다. 국민 여러분의 도움이 없었더라면 저희는 이 자리에 설 수조차 없었을 것입니다. 고인들의 마지막 가시는 길까지 함께 배웅해 주셔서 너무나 감사합니다.

 

덕분에 장례를 치르게 되어 오랜만에 다섯 가족이 한 자리에 모였습니다. 아버지 영전에 절 한번 올리지 못한 우리 막내도 감방에서 잠시 돌아와 상주 역할을 할 수 있었습니다. 수개월이 지나도 사태가 해결될 기미가 보이지 않자, 어쩔 수 없이 뿔뿔이 흩어져야 했던 아이들도, 군대와 학교에서 돌아왔습니다. 텅 빈 영안실도, 뻥 뚫린 가슴도, 조금이나마 채워졌습니다.

 

하지만 막상 돌아가신 분들을 땅에 묻으려니, 또다시 가슴에 찬바람이 휑하고 지나갑니다. 갖가지 회한이 밀려옵니다.

어제 정운찬 국무총리가 영안실을 찾아 왔습니다. 늦게 와서 죄송하다고 했습니다. 유가족이 마음을 열고 양보해 줘서 감사하다고도 했습니다.

 

진작 보낼 것이었다면 왜 1년이나 끌어왔습니까? 화마에 불타고 칼에 찢겨진 내 남편, 내 아버지의 시신을 부여잡고 하루하루를 생지옥에서 살아야 했던 저희 유가족들을 왜 1년이나 외면하셨나요? 2009년 마지막 그날까지 사과 한 마디 하기가 그렇게 어려우셨나요?

 

고인들을 더 이상 차가운 냉동고에 둘 수 없어서 힘든 결심을 한 유가족들에게, 차마 입에 담을 수 없는 말을 하는 분들도 계시더군요. 애써 못 본 척 못 들은 척 했지만, 지난 1년 전 고인들을 '도심 테러리스트'라고 몰아붙인 기억들이 되살아나 마음이 참으로 편치 않았습니다. 고인들의 육신은 땅에 묻어드릴 수 있겠지만, 테러범, 살인범으로 낙인찍혀 땅바닥에 떨어진 고인들의 명예는 앞으로 어찌해야 하겠습니까.

 

충연이도 오늘 아버지를 묻고 나면 다시 감방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지옥 같던 불구덩이에서 뛰어내리다 다친 허리와 다리가 낫지 않아서, 상중에도 계속 침을 맞고 진통제를 먹어야 했습니다. 열손가락 깨물어 아프지 않은 손가락 없다는 말이 있습니다. 하물며 어릴 적 못 먹어서 가뜩이나 자그마한 막내가, 신혼 초에 생이별을 하고 다리를 절뚝이며, 언제 나올지 기약도 없이 차가운 감방으로 다시 돌아가야 하는데, 그걸 보는 이 못난 어미의 마음은 어떻겠습니까.

 

어미의 마음은 곧 동지의 마음이기도 합니다. 남의 문제를 나의 문제로 알고, 누가 먼저라 할 것도 없이, 저 높은 망루에 올랐던 동지들이 오늘도 감방에 있습니다.

 

저희 유가족은 오늘 고인들을 땅에 묻는 것이 아니라 가슴에 묻습니다. 지금까지 국민 여러분들로부터 과분한 사랑을 받은 저희 유가족, 앞으로 갈 길이 멀기에 다시 한 번 염치불구하고 당부 드립니다.

 

돌아가신 분들이 어떻게 돌아가셨는지 진실을 밝혀서 명예가 회복될 수 있도록 힘을 모아주세요. 또 억울한 누명을 쓰고 차가운 감방에 갇힌 내 아들, 우리의 동지들이 하루빨리 무죄로 풀려날 수 있도록 지혜를 모아주세요.

 

그리고 우리와 같은 철거민들이 이 땅에서 희망을 발견하지 못해 저 위태로운 하늘 끝 망루로 오르는 일이 없도록 이 잘못된 재개발을 바로 잡아 주세요. 없는 사람들이 더불어 살 수 있는 사회를 만들어주세요.

 

저희 유가족, 국민 여러분이 베풀어주신 은혜 잊지 않고 꿋꿋이 살겠습니다. 그 은혜 갚겠습니다. 감사합니다.

 

2010년 1월 9일

‘용산참사 철거민’ 민중열사 유가족 일동

 

   

노제 유가족 인사: 고 이성수 열사 부인 권명숙

 

애 아빠가 일년 만에 용산에 돌아왔습니다. 불타고 녹슨 망루처럼, 할퀴어진 건물들처럼, 을씨년스러운 겨울바람처럼. 검게 그을리고, 갈가리 찢기고, 차갑게 얼어붙은 남편의 시신이 한 서린 용산에 왔습니다.

 

2009년 1월 20일, 무엇이 그리 두려웠나요? 왜 시신을 도둑질해서 갈기갈기 찢어놓고 버렸습니까... 육신을 더럽혔으면 명예라도 깨끗이 씻겨줘야지요, 어찌하여 도심 테러리스트라고 몰아부쳤답니까. 그 한 많은 영령이 어떻게 눈을 감으라고 이런 잘못을 저질렀답니까.

 

어제 시신을 관에 모셨습니다. 그동안 저 차가운 냉동고에서 얼마나 추위에 떨었을까요? 위령굿을 지내던 날, 만신님의 입을 빌어 ‘추워, 추워’라고 절규하던 애 아빠의 모습이 아직도 선선합니다. 그동안 하도 많이 울어서 더 이상 나올 눈물이 있을까 했는데, 이것이 마지막 모습이라는 생각을 하니 주체할 수 없이 눈물이 나왔습니다. 바보 같은 소리지만, 냉동고에 계실 때는 시신이라도 볼 수 있었는데. 이제는 사진과 기억으로밖에 볼 수 없는 당신... 꿈속에서만 만날 수 있는 당신...

 

그 마지막 모습은 왜 그리 가녀리답니까? “아버지가 왜 이렇게 작아? 애기 같아...”라며 아이는 말문을 닫지 못합니다. 정말이지, 화마에 불타서 남편의 다리는 젓가락 같았습니다. 수의를 입혀드리고 흰 천으로 염습을 해도 그 모습은 너무나 왜소했습니다. 다시 한 번 억장이 무너졌습니다. 그래서 차마 화장은 하지 못했습니다. 불구덩이에서 돌아가신 분들을 다시 한 번 불길로 모시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장례를 치르고 1년 만에 집에 돌아간다 한들 전과 같을 수는 없겠지요. 애 아버지 없이 어떻게 생활을 이어갈지 막막하기만 합니다. 돌아갈 집도 마땅치 않습니다. 그래도 여러분들이 용기를 주셔서 정신과 치료를 마치면 빌딩 청소라도 해서 아이들 가르치겠다고 굳게 마음 먹어봅니다. 하지만 텅 빈 방 한구석에 자리 잡은 내 남편, 내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을 쉽사리 씻을 수야 없겠지요.

 

다행히도 지난 일 년 동안 아이들이 훌쩍 자랐습니다. 아버지 떠나는 모습을 보지 못하고 입대했던 큰 아들이 조문객을 받는 모습을 보니, 정말 이제는 어른이 다 됐구나 하는 생각에 얼마나 든든한지 모릅니다. 그런데 한편으로 이렇게 예쁘게 컸는데, 아빠가 그 모습을 못 보는 게 너무 안타깝습니다.

 

용산을 뒤로 하고 떠나려니 마음이 편치 않습니다. 남편의 원혼이 서린 남일당에서 하루하루를 지내는 것이 너무나 힘들어 이렇게 정리하고 떠나는 게 다행이라고 생각하지만, 호시탐탐 저희가 떠나기만을 기다리는 포클레인과 덤프트럭을 보면 마음이 무겁기만 합니다. 우리가 용산을 떠난다면 언제 그런 일이 있었냐는 듯, 이곳을 부자들의 천국으로 만들겠지요. 우리 같은 서민들이 이곳에 살았는지 기억도 못할 정도로 화려한 용산을 만들겠지요.

 

반쪽짜리 장례가 아니었다면 한결 마음을 내려놓을 텐데, 가난을 힘으로 다스리려고 하는 정부, 사람의 목숨 앞에서 자존심 따지는 정부가 너무 야속합니다. 많이 늦고 아쉬운 점이 많지만, 어쨌든 정운찬 총리가 정부를 대표해서 사과하시니 그 마음 고맙게 받겠습니다. 총리가 어제 사과하고 약속하셨듯이, 정부는 돌아가신 분들의 명예를 회복시켜주시기 바랍니다. 또 너무 섣부른 재개발로 없는 사람들을 길거리로 내몰지 않았으면 합니다. 꼭 약속 지켜주세요.

 

이제 국민 여러분께 마지막 인사를 드릴 때가 된 것 같습니다. 비참하게 돌아가셨지만, 마지막 길은 외롭지 않아서 너무 다행입니다. 시간이 흐르면 잊혀질까 두려웠는데, 이렇게 많은 분들이 함께 해주시 저희 유가족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범대위, 신부님-수녀님, 목사님, 국회의원님, 문화예술인, 레아식구들, 용산을 잊지 않은 시민들... 지난 1년간 이 나라 정부가 버린 저희들을, 집도 절도 갈 곳 없는 저희들을, 따뜻이 보살펴주신 국민 여러분께 다시 한 번 깊은 감사의 말씀을 올립니다. 저희 유가족도 여러분 믿고 끝까지 싸워서 그 고마움 반드시 보답하겠습니다.

 

2010년 1월 9일

‘용산참사 철거민’ 민중열사 유가족을 대표해서 권명숙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