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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둥글이
제목

6월 28일 - 용산 풍경 / 소름돋는 장면 / '자기성찰'의 함정

작성일
2009.06.29 13:53:21
IP
조회수
2,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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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서 주소
http://mbout.jinbo.net/webbs/view.php?board=mbout_4&id=2880

 



 




도무지 인간이 사는 세상에서 보일 법하지 않은 초현실적인 장면.
언 듯 보기에는 몇 사람이 빙 둘러 모여 이야기를 나누는 평이한 장면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 상황의 깊은 의미는 우리를 경악하게 하기에 충분하다.

* 상복을 입은 여사들은 정부와 공권력, 재개발업자들의 무자비한 집중 공격에 의해서
올 1월 20일 용산 남일당 옥상 망루에서 희생당한 이들의 미망인들.
* 바닥에 놓인 서류는 이들 유가족을 비롯한 세입자주민대책위에 의한 ‘작업차질’을 문제 삼으며
8억 7천만 원을 배상해 내라는 ‘손해배상청구 촉탁서’.
* 그리고 서류를 내 보이는 이는 이곳 남일당 건물 옥상에서 다섯 명의 죽음을 빚어내는데
혁혁한 공?을 세운 것으로 인정받는 ‘재개발조합’의 대리인.

사람이 죽어간 160일이 지났어도 장례를 치루지 못하는 이 한 많은 여인들 앞에 그 참사의 한 주체세력이
‘사업에 손해를 준다.’며 손해배상청구서를 대뜸 들이대는 이 모습은 공포와 소름을 돋게 만든다.

도무지 현실의 것이 아닌 것 같은 이 기괴함 속에서 우리가 몸부림을 친다면 이 악몽으로부터 벗어 날 수 있을까?
사람의 죽음은 보이지 않고, 손앞에 쥐어지는 이익만을 쫓는 사람의 세상이 슬프다.

 


 



  [하늘씨앗살이학교의 교장선생님이신 김영근신부님께서 레아 2층에서 조촐한 미사를 진행하셨습니다.]


 



 


[97년 서품을 받은 신부님은 소외된 청소년들의 약물(본드 등)하는 청소년 계도에 매진해 오셨습니다.


이에 그룹 홈을 운영하면서 청소년 선도와 바른 가치 함양을 위한 일을 소명으로 생활해 오신 분입니다.


현재 김포에 있는 씨앗살이학교에서 13명의 아이들을 대상으로 대안학교를 운영하시고 계십니다.


생각지도 못한 터에 갑자기 이런 자리에서 뵈니 동지애?가 피어오릅니다.]


 



 


[민중교회인 ‘돌산교회’에서 부목사님과 신도들이 오셔서 분향소 앞 천막에서 예배를 보셨니다.


우성구 준목사님이 수고를 해주셨습니다.]


 



그런데 여느 교회에서 듣지 못하던 찬송이 흘러나옵니다.


 



우리들에게 응답하소서


혀짤린 하나님


우리 기도 들으소서


귀먹은 하나님


얼굴을 돌리시는


화상당한 하나님


그래도 내게는 하나뿐인


민중의 아버지




하나님 당신은 죽어버렸나


어두운 골목에서 울고계실까


쓰레기 더미에 묻혀버렸나


가엾은 하나님




그리고 ‘결단 찬송’이라고 불리우는 시간에는 생소한 관경이 연출됩니다.




       



[민중가요 ‘임을 위한 행진곡’을 부르며 의지를 다지는 신도의 모습]



분명히 예수께서도 부정과 부조리와 불의의 모습을 보고 분노하셨고,


이에 나서서 싸우셨고, 뒤집어엎기도 했습니다.


아름답고 고운 것. 즉 사랑과 화해의 믿음도 분명 필요합니다. 하지만 대책 없는 낙관론 속에서 세상의 책무를 져버리는 믿음이


균형을 잃는 것이 아닌가 하는 우려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여 이렇게 다소 ‘급진적’이지만, 실천적으로 나서는 이들의 믿음이


참으로 필요하게 보입니다. 이 무지와 야만의 시대를 구원할 ‘투쟁의 예수’를 기다려봅니다.  


 



 


[투쟁-지지 격려 롤링페이퍼 작성시간 / 우성구 준목사님께서 격려 말씀을 쓰고 계십니다.]


 



이 날은 또 한분의 특별한 분이 와주셨습니다.






[인터넷에서 ‘진녀의 이름으로’라는 특이한 카페를 운영하시는 ‘도인’이십니다. 승복을 입고계시지만, 스님은 아니십니다.


신학대학생 출신으로 “예수천국 불신지옥”의 기치를 내 걸고 열렬히 전도활동을 다녔을 만큼 열광적 기독교 인이었지만,


어느 순간 갑자기 이에 대한 집중력이 떨어지면서 다양한 종교를 접하시기 시작하셨답니다. 승복을 입고 있는 것은


다만 편해서일 뿐이고, 목탁을 두드리면서 화복을 기원하는 여러 주문-염불은 필요에 맞게 스스로 만드신 것이라고 합니다.


그야말로 이 시대 보기 힘든 ‘도인’의 다름이 아니지요.]


 



 


[잠시 위령하시는 모습.


용산 사태를 접하시고 오시려고 했지만, 어찌하다보니 늦어졌다고 하십니다. 분향소에 들어가 20여 분간 희생자의 영을 달래는


주문을 외우셨다고 합니다. 필명은 ‘지위리’를 쓰시는데 이분과는 과거로부터 인터넷을 통해 아는 분이여서 다양한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지위리님은 작금의 시대에 종교인들(기독교, 불교, 노장 등...)의 무실천적 믿음을 많이 안타까워하십니다.


삶과 실천에 맞물리지 않는 믿음이라는 것은 결국 허황된 것이기에 ‘나서서 행동하는 믿음’을 가진 이들이 좀 더 많이 세상에


나와서 세상을 변화시키는 ‘믿음’까지를 믿기를 바라신다고 하셨습니다. 믿음의 본질이 투쟁하고 세상을 변화시키는 것은


아니지만, 제대로 믿다보면 당연히 세상을 변화시킬 힘을 낼 수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이분의 독특한 정신세계를 들여다 볼 수 있는 카페를 소개해드립니다. 너무 난해한 이유로 쉽게 사람들이 범접하지 못하는


싸이트입니다.  => http://cafe.daum.net/jinneo


순천향대병원에 희생자의 시신이 안치되어 있음의 사실을 확인하시고는 그곳으로 염불 드리기 위해 이동하셨습니다.]


 



 


[저녁에는 다양한 국적을 가진 인물들이 방문하셨습니다. 레아 옥상에서 참사 현장을 둘러보고 있습니다.


왼쪽 앞쪽에 주먹을 불끈 쥔 청년은 ‘아마추어의 반란’이라는 책을 쓴 일본인입니다. 다큐멘터리로도 만들어져서 소개되었다는데,


아웃사이더 진영에서 상당히 유명한 분인가 봅니다.]


 



=> 사진과 글이 안보이거나 넓게 떨어져 보이면 제대로 보기 클릭


 


 



---------------------- 잡글 : 자기 성찰의 함정 -------------------------------

경고 : 이 장황한 글을 다 읽는 것은 정신건강에 해로움으로 드믄드믄 잃으시기 바랍니다.

세상의 수 많은 부정과 부조리와 불의를 접하고서도 이에 나서지 않는 두 부류의 사람들이 있다.

하나는 세상의 문제에 '철저히 무관심한 이들'이고,
다른 하나는 '사회구조적 문제에 무관심한체 자기성찰에만 몰두한 이들' 이다.

첫째 부류의 무관심을 치유하기위한 방법은 쉽게 이뤄지는 것이 아니지만,
그 교육적-사회적 방법론 등에 대해서는 일치하는 선이 있기 때문에 이는 거론하지 않기로 한다.

하지만 둘째 부류의 사람들의 경우에는 세상이 올바로 세워지는 것에대한 관심은 있으되,
사회구조적인 변혁에는 관심이 없는 사람들로서, 잘 다독이면 사회적인 활동에 참여할 수 있는
의식적 근거를 줄 수 있음으로 이에 대해서 좀 거론하고자 한다.

이들 두번째 부류의 사람들은 흔히 '내 마음-내 자신이 먼저 변해야 세상이 변한다'고들 말한다.
이들은 주로 기독교(카톨릭)의 영성, 불교의 무아심, 노장자의 무위자연적 발상에 익숙한 이들인데,
종교 종단적으로 이 특징을 추스려보면 그 안에는 '극단적 주관주의-관념론-감상론'이 맥에 닿아있다.

물론 '내 마음 - 내 자신이 먼저 변해야 한다'는 말은 원론적으로 틀린 말은 아니다.
이런 표현은 사회운동하는 이들도 흔히 사용하곤 한다. 일 예로 "세상이 이렇게 어지러운 것은 결국
내 자신의 욕심으로부터 시작된 것이 아닌가 반성해야한다"는 부류의 이야기들을 우리는 투쟁의 현장에서 종종 듣는다.

문제는 '마음의 문제'(자기성찰)에만 관심을 가진 둘째 부류의 사람들은 사회에 인위적으로 가하는 힘 자체를 거부한다.
예를 들어 '주의주장' '집회' '투쟁'을 통해 '정치' '제도'의 변혁을 꿰하려는 노력이 잘 못이라고 여긴다.
오히려 그러한 나섬의 행위가 사회의 안정을 헤치고, 갈등과 폭력을 재생산하며, 결과적인 불이익을 만들어낸다는 것이다.
기독교(카톨릭)의 영성, 불교의 무아심, 노장자의 무위자연적 발상에 환호하는 이들의 상당수가 그러한 입장을 취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들 '주관적 환원론의 함정'에 빠진 이들은 세상의 모든 문제를 '내 개인의 문제'로만 환원해서 생각한다.
따라서 모든 문제의 '열쇄'인 '내 마음'을 잘 다스리는 것에 절대적 우선순위를 둔다.

이 나라에서 빚어지는 처참한 사건들에 관심있게 나서지 않는 이들은 '보수단체' 사람들만이 아니라,
그렇게 모든 문제를 '주관의문제로 환원'하는 이들도 상당수 있는 현실이다.

이들은 '결과적 보수주의자'들이라고 일컬어지는 이들 중의 한 부류이기도 하다.

사회운동을 하는 이들은 '적들'과 싸우는 노력과 더불어
이러한 이들을 '아군'으로 끌어 모으는 노력도 병행해야 한다.
그러하기 위해서는 이들의 '심리'를 냉철하게 들여다볼 필요성이 있다.

글을 하나 소개한다.


내가 젊고 자유로워서 상상력에 한계가 없을 때
나는 세상을 변화시키겠다는 꿈을 가졌었다.

좀더 나이가 들고 지혜를 얻었을 때
나는 세상이 변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내 시야를 약간 좁혀
내가 살고 있는 나라를 변화시키겠다고 결심했다.
그러나 그것 역시 불가능한 일이었다.

황혼의 나이가 되었을 때
나는 마지막 시도로 나와 가장 가까운 내 가족을 변화시키겠다고 마음을 정했다.
그러나 아아, 아무도 달라지지 않았다.

이제 죽음을 맞이하기 위해 자리에 누운 나는 문득 깨닫는다.
만약 내가 내 자신을 먼저 변화시켰더라면,
그것을 보고 내 가족이 변화되었을 것을.

또한 그것에 용기를 얻어 내 나라를 더 좋은 곳으로 바꿀 수 있었을 것을.
그리고 누가 아는가, 세상까지도 변화되었을지 !


- 웨스트민스터 대성당의 지하묘지에 묻힌 어느 주교의 묘비명 중
'영혼을 위한 닭고기 스프' 중에서 ( 잭 캔필드 )


'자기 내면의 문제의 성찰'을 강조하는 좋은 글이다.
하지만 이런 글은 자칫 오용되면 '세상의 모든 문제를 주관적문제로 환원하는 함정'에 빠지게할 빌미를 줄 수 있다.

우선 저런 부류의 글들은 사회적으로 '무의지'를 작용시키는 교묘한 역할을 한다.
'사회구조적인 변화'를 이끌어내는 세력을 잠재우고 방해하기 위해서 '종교적 교리'가 어떤 식으로
변화되어 왔는지를 살필 역사적 소양이 된다면 위의 글의 의미는 조금 다른 식으로 이해될 것이다.
기독교(카톨릭) 교리가 어떤 식으로 정치권력자들에 의해서 '무실천의 종교'로 바뀌었는지에 대해서는
과거로부터 수 많은 자료에 의해 고증된 터다.

저 글은 주교 당사자가 한 말이 아님에도 정치적 목적으로 만들어진 것일 수도 있고,
주교 당사자가 했던 말이더라도 그가 모든 문제를 지극히 '개인의 문제로만 환원'하는 이의 글일 수도 있고,
혹은 지극히 무능했기에 아무런 사회변화는 물론이거니와 공동체의 변화도 못 이끈 말미에 쓴 참회의 글일 수도 있다.
물론 이 말은 '개인적 성찰과 변화의 노력' 자체를 폄하하려는 의도는 아니다.
다만 저러한 부류의 글이 '내 마음'만의 문제로 세상의 문제를 환원하려는 이들에게 교묘히 작용하는 특성을
여러방식으로 설명하려할 따름이다.

철저히 '주관적' 관점으로만 세상을 바라보면 '내가 세상에 나서서 한 일의 의미'가 표면적으로만 의미화되어지고,
건조해지고 별 볼일 없는 무료한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하기에 세상의 문제에 나설 필요가 사라지는 것이고,
오직 내면의 문제만을 주시하게된다.
하지만 각각의 '주관이 맞물려있는 대아적 세계(공의 세계)적 관점'은 내가 올바로 세계에 작용하는 만큼
세상이 밝아질 것을 약속한다. 이러한 세상 속에서는 '더불어' 그 속에 거주하는 인간들의 깨침이 증대되고,
영적인 성숙을 이룰 기회가 확대된다.

하여 '그들' 주관적 환원론의 함정에 빠진 이들에게 이러한 이해의 제공을 통해서 세상에 나서게끔 이끌어야 한다.

물론 이 말은 '자기성찰도 없는 상황에서의 무조건적인 사회투쟁적 활동'을 권장하는 것이 아니다.
자기 성찰없는 상황에서 나서는 사회투쟁적 활동은, 세상의 모든 문제를 주관적 문제로 환원하는 이들 만큼이나 위험하다.

하여간 그들 '세상의 모든 문제를 주관적문제로 환원하는 함정에 빠진 이들' 내지는
'내 자신의 영적 성숙을 이룬 후에 세상의 문제에 관심을 갖고자 우선순위를 결정한 이들'을
우리는 세상으로 끌어내야 한다.

그들에게는 사람으로서 존재하고 있는 것 자체가 자연과 사회의 자원과 기회를 앗아가고
상대적인 결핍과 상실을 불러일으키는 것이기에 이에 대한 마땅한 사회적 책임을 치루려 하지 않고
'나'의 세계에만 갖혀 있는 것은 자연과 사회에 대한 큰 해악임을 인식시켜야 한다.

앞선 부류의 (인용)글이 근본적으로 '자기편리적 사고' '자기 지향' '무의식적 욕구' '자기애'를 공고히 할 수 있기에
자칫 그 함정에 빠지지 않도록 잘 인도하는 노력도 필요하다.
물론 이는 저 글 자체의 작용이 해로워서가 아니라, 저 글을 대한 사람의 내면에서 이뤄지는 작용의 문제를 삼음이다.

이러한 이해까지에 다다르면 '내 마음을 먼저 알아야 한다' '내 자신이 먼저 변해야 한다.'는 부류의 말은
'세상의 문제에 관심은 뒷전으로 미뤄야 한다'라고 이해해야할 그것이 아니라,
저런 글을 접했을 때 자신도 모르게 현실도피 성향을 추구하는 '관념적' '초월적 경향성' '주관적 환원성'의 함정을
잘 들여다봐야한다는 의미로 그들이 이해할 수 있는 '의식의 통로'가 만들어 질 것이다.
우리는 그것을 그들에게 보여야 한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현실'과 '이해'가 둘로 나뉘어질 필요도 없고,
'내 자신을 찾은 후(도-영생)에 세상의 문제에 나설 것이다'고 우선순위를 정할 일도 없으며,
번잡히 '도' '영생' 운운하는 것을 찾아다니기 위해서 싸돌아다닐 일(혹은 공부할 일)도 없을 것이다.
삶 속에, 사회적 사회적 참여와 실천속에 그것이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가족주의가 공고히 만들어내고 있는 '극단적 주관주의'와
한의 정서-한국인 특유의 감성의 복합물이 만들어낸 '초월적 감성지향성(기복-영성을 추구하는 성향)'이
수 많은 한국인으로부터 사회적 실천의 기회를 앗아가는 심리적 빌미를 제공하고 있는 듯 하다.

그 함정에 빠지지만 않았다면 사회적 약자와 후손들의 존립을 위협하는 투쟁의 장에 좀 더 많은 개인들이 모였을 것이다.
하지만 지난 일 한탄해서 무엇하랴? 그 '함정'이 어떤 것인지를 명철히 살필 수 있다면,
많은 이들을 그 속에서 끄집어 낼 수 있을 것이다.

그 길을 발견해야하는 것도 우리시대를 고민하는 이들의 몫이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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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기 싫은 것을 "먹기 싫다"고 말해도 두들겨 맞지 않는 나라,


잘 못된 것을 "잘 못이다"라고 말해서 끌려가지 않는 나라,


자신의 양심에 따라 사는 것이 죄가 되지 않는 나라에 살고 싶습니다.




이곳 홈페이지에 들어와서 유가족과 세입자분들에게 힘을 실어 주십시요.


* 용산철거민 참사 범국민대책위원회 => http://mbout.jinbo.net/


* 촛불 미디어 센터 => http://cafe.daum.net/Cmedia


* 주민대책위 식비 등 후원 => 국민은행 295401-01-156716(이종회)



 


[ 글 => 둥글이  http://cafe.daum.net/my80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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