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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보, 쪼다, 병신, 그것이 우리의 하느님입니다"-12월 9일 미사

작성일
2009.12.12 22:4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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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산참사의 올바른 해결을 위한 생명평화미사 소식

2009년 12월 9일 | 기도회 177일째 | 참사 324일째

 

 

 

 

 

 

"바보, 쪼다, 병신, 그것이 우리의 하느님입니다"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

 

 

 

강론 장동훈 신부(인천교구 빈민사목위원회)

 

 

 

용산에 올 때마다 자주 던졌던 질문이 있습니다. 왜 하느님 당신은 암 것도 하지 않습니까? 이 통곡하는 이들의 울음소리가 들리지 않습니까? 사람이 죽어나도 오만하기 이를 데 없는 저들을 당신은 왜 가만둡니까? 수천만이 죽어나갔던 2차대전의 포화 속 입을 다문 당신처럼 이번에도 침묵하시렵니까? 그 침묵의 의미는 뭡니까? 아니 당신 하느님, 계시기나 하신 겁니까? 당신 정말 있기는 한겁니까?

 

용산을 찾는 이는 누구나 답답하고 혼란스러운 마음에 한번쯤 던져봤음직한 질문입니다. 일 년이 다가도록 해결의 기미가 보이지 않는 이 현장에서 도대체 우리가 믿는 하느님이 어떤 분이기에 이토록 아무 것도 하지 않으실까 자주 묻게 됩니다. 하느님이 있다면, 뭔놈의 하느님이 이리도 힘이 없는가. 마음 같아서는 하늘에서 분노의 불똥이라도 쏟아 부어 이 말도 안 되는 세상을 불살라 버리셔야하지 않은가... 이런 풀리지 않는 질문을 안고, 답답한 가슴으로 용산을 자주도 찾았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새벽. 잠이 오지를 않아 천막에서 뒤척이다 커피한잔을 마시러 나왔습니다. 간간히 지나가는 차들과 여전히 낮처럼 불야성을 이룬 간판들, 새벽이슬로 촉촉해진 아스팔트와 도로변 화초들, 그리고 분향소 앞 잠들지 못한 촛불들. 조는 것인지 아님, 추위에 떠는 것인지 알 수 없는 분향소 새벽파수꾼의 움츠린 어깨. 모두 잠든 시간, 이상하게 그렇게 자주 찾아왔고 익숙한 풍경인데 다르게, 새롭게 보이는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다섯 열사의 눈동자였습니다. 막상 생각해보니 죽은 이들의 얼굴을 찬찬히 쳐다본 적이 없었던 것입니다. 만난 적 한번 없는 이 열사들의 얼굴은 그저 이곳의 아픔과 상처, 분노에 뭉뚱그려져 저에게 전혀 개별적이지도 그리고 얼굴을 기억할 만큼 애틋하지도 않았습니다. 단지 다섯 명이 죽었다는 그 사실이 중요했을 뿐, 단지 수많은 세입자들이 소중한 삶의 터전과 가족을 잃었다는 안타까움이 다섯 열사를 사람으로 만나지 못하게 했나봅니다.

 

찬찬히 이름과 함께 다섯 명의 얼굴을 쳐다보았습니다. 너무나 평범해서 길을 지나다 만나도 모를 것 같은 익명의 얼굴들은 그렇게 제게 말을 걸어오고 있었습니다. 소소한 일상, 소박하게 꾸던 꿈, 그리고 사랑하던 아내, 자식을 바라보던 대견하고 사랑스러운 눈빛, 세상을 향해 이글거리던 분노의 눈빛, 그리고 애타고 절박했던 마지막 밤의 처절함. 다는 보이지 않지만 그 눈빛들은 그 새벽 저에게 그렇게 말을 건네는 것 같았습니다. 제 속에서 터져 나왔습니다. 사람이구나....! 복잡하고 부산했던 마음이 아주 단순해지고 힘이 났습니다. 아 사람이구나....!!

 

우리들의 하느님은 전장에 나간 수백 명의 병사들이 죽어나도 눈 하나 깜짝 않는 배포 큰 사령관이 아닙니다. 전략적 후퇴를 외치며 불의한 요구에 적당히 타협하는 명민하고 계산 빠른 경영자도 아닙니다. 우리 하느님은 물집이 잡히고 살이 찢겨 힘겹게 걸어오는 저 맨 뒤의 병사 때문에 어찌할 줄 몰라 마음조리는 영락없는 졸부입니다. 거기다 실리를 명분으로 타협할 줄도 모르는 벽창호에 소심하기 짝이 없는 바보입니다. 잃어버린 한 마리의 양을 찾기 위해 울며불며 들과 산을 미친놈처럼 쏘다니는 바보. 세상이 보기에 영락없는 바보, 쪼다, 병신, 그것이 우리의 하느님입니다.

 

정의를 노래했던 제 일독서의 이사야서는 이런 하느님의 진짜 힘을 알려줍니다. 이사야는 하느님의 그 막강한 권능과 위대함은 힘과 숫자에서 오지 않음을 알려줍니다. 그 힘은 오히려 소소히 하나하나 이름을 불러주는 하느님의 인간다움에 있다고 이야기합니다. "그 군대를 수대로 다 불러내시고, 그들 모두의 이름을 부르시는 분이시다" 이름을 부른다는 것. 참 가슴 설레는 일입니다. 하나하나 빠짐없이 이름을 불러주는 그 세심함이 우리 하느님의 권능과 권세임을 이야기합니다. 하나도 빠짐없이 기억해주시는 분. 하느님의 사랑법이고 힘이고 권능입니다. 이름을 부른다는 것, 자신의 피붙이처럼 우리 각자의 이름을 부르는 하느님의 힘은 다름 아닌 그 이름 불리워진 "사람"에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침묵하고 무력하기 짝이 없던 그 하느님은 하나하나 빠짐없이 부른 사람에게 자신의 입도 손도 다 내어줍니다. 아니 하느님 당신의 입이 곧 우리 입입니다. 하느님 당신의 팔과 다리가 곧 우리입니다. 침묵이 언어가 됩니다. 무력함이 권능이 됩니다. 파멸할 존재들이 세상을 구원할 희망의 존재가 됩니다. 우리가 지칠 줄 모르는 것이 하느님을 지칠줄 모르게 하는 것이고 우리가 간절하게 소망하는 것이 하느님 당신의 간절함이고 우리가 믿는 세상이 하느님 당신이 믿는 세상입니다.

 

그러니 하느님이 주는 안식은 전장에 돌아와 전리품을 나눠주는 사령관의 아량도 그리고 편한 잠자리와 먹을거리의 안락함도 아닙니다. 오늘 복음의 이야기처럼 하느님이 주시는 안식은 어쩌면 멍에 인지도 모릅니다. 춥고 지루하고 그리고 비루하기 짝이 없는 이 골목처럼 그 바보 하느님이 주는 안식은 안식이 아니라 멍에입니다. 우리가 포기할 수 없어, 이대로 물러설 수 없어, 이곳에서 울고 웃고 또 죽고 부활했던 이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간절히 불러주며 지키려하는 것은 이득도, 그럴듯한 보상도 아닙니다. 그것은 오히려 사람에 대한 무한한 신뢰와 애정이고 불편한 정의입니다. 당신의 멍에를 매고 배우라 하십니다.

 

그 멍에는 편하고 가볍다고 합니다. 불편하지만 우리는 떳떳하고 분노에 밤잠을 설치지만 옆에 함께 누운 "사람"이 있어 마음이 든든하고 가벼워집니다. 바로 이곳에 우리가 학수고대하는 하느님이 사람이 되어 오신 신비가 깃들어 있습니다. 아니 벌써 우리는 그 신비를 각자 "너"의 이름을 하나도 빠짐없이 부르며 이곳에서 배우고 또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하느님에게서, 즉 사람에게서 희망을 다시 찾읍시다. 이사야 예언자의 이야기처럼 사람을 바라보며 이름을 불러주고 새힘을 얻고 독수리처럼 날개치며 올라갑시다. 뛰어도 지치지 말고 걸어도 피곤할 줄 모르게 하는 사람에게서 해답을 찾읍시다. 사람입니다.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

 

 

공동집전 신부님

 

■ 주례 : 이재규(인천교구 성모자애병원 원목실) ■ 강론 : 장동훈(인천교구 사회사목국 차장)

■ 인천교구

-  김일회, 김종성, 이재규, 장동훈

■ 서울교구

-  이강서, 나승구, 이계호

■ 전주교구

-  문정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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