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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인자
제목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집이 있으되 나는 머리 둘 곳이 없도다

작성일
2010.10.12 01:42:12
IP
조회수
2,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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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문서 주소
http://mbout.jinbo.net/webbs/view.php?board=mbout_4&id=6159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집이 있으되 나는 머리 둘 곳이 없도다
 

 고파#너머 웹소식지에 회원 칼럼란을 만들기로 결정하고 나서 첫번째 칼럼은 행신동 세입자 투쟁위원회 김혜자 회원에게 부탁하기로 했다. 날마다 고양시청앞 집회와 연대투쟁을 하면서 글을 쓴다는 것이 여간 벅찬 일이 아닐 것이다. 그래서 방문인터뷰를 하고 정리하여 올리기로 했다.

  인터넷에 '행신동철거민'이라는 검색어로 많은 글들이 발견되었다.


- 어느 노점상의 글이다.

겨울에 따뜻한 물은 커녕 차가운 물조차 나오지 않은 생활 속에서 어린 아이들이랑 살면서 제대로 발 한번 제대로 씻지 못한 것 같아 얼마나 억울하고 분할까? 집회 때마다 집회 현장에 내거는 긴 천에 쓴 <따뜻한 물을 마음껏 쓰고 싶다. 대명건설아! 각성하라!> 구호가 작년 여름 쌍용차 동지들의 소망과 너무나 흡사한 <시원한 물 한잔 마시고 싶다>와 같아 보인다.

- 라디오 21 인터뷰 글이다
" 그 날은 10월 1일 국군의 날이었어요. 이웃동네 주민들은 국군의 날 행사를 하는 줄 알았대요. 우리 동네가 산속으로 좀 들어가 앉았는데, 그 주변을 철거용역과 경찰이 까맣게 에워쌌어요, 벌써 밤부터 그렇게 포위를 한 거예요. 이삿짐센터 차는 또 얼마나 동원했는지 몰라요, 그렇게 만반의 준비를 갖춰놓고는 들이닥친 거죠, 새벽기도 가려고 일어났다가 그걸 보고는 제가 기겁을 했습니다." 

" 다른 곳으로 갈 데가 있었으면 갔을 것이다. 엄마들은 애들 다칠까봐 그게 제일 불안하다. 그래서 눈물 머금고 다들 떠나가고, 저희는 정말 갈 데가 없었다."
" 힘든 것도 힘든 거지만, 용역들이 난리를 치고 가면 아이들이 최소 이틀은 학교를 못 간다. 교복은 입혀 보내야 하니까 다시 교복 마련하고.... 그렇게 몇 년을 전전하다가 지난 초겨울부터는 결국 비닐천막도 철거당해서 봉고차에서 살게 되었다. 난방도 안되는 차 안에서 휴대용 버너를 켜고 자는데, 얼마나 추운지 자다가도 혈압이 떨어지는 게 느껴질 정도였다."

- 어느 블로그에는 날짜별로 정리해놓은 글도 보인다.
2008년 6월 10일 : 천막 행정 대집행 철거. 이후 아이들과 차량에 의지해 생활함.
2008년 6월 15일 :부부 동시 구속. 어머니는 구속적부심으로 석방되었으나 아버지는 고소로 수감됨.
2008년 7월 15일 :어머니 구속되어 의정부 교도소에 85일 동안 수감됨.
2008년 11월 27일 :기자 회견하는 연행 동지 전원 연행.
2008년 11월 29일: 연행 동지 석방. 아버지는 구속되어 지금까지 수감 중.
2009년 2월 13일 :아버지는 현재 의정부 교도소에 수감 중이며 재판 진행 중.
2009년 2월 22일 :천막과 차량을 불법 적재물로 규정, 자진 철거 하지 않으면 강제 철거하겠다고 위협 중. ...

- 이런 글도 보인다.
현재 주택재개발사업, 주거환경개선사업 등 공공개발사업은 실제 이행 여부를 차치하더라도 '공익사업을 위한 토지 등의 취득 및 보상에 관한 법률(토지보상법)' 등 관련 법률로 세입자들에 대한 이주대책 보장을 규정하고 있다.
"사람들이 지나가다가 진짜 사람이 사는지 들여다보기도 하더라. 하지만 우리에겐 가족이 함께 있을 수 있는 보금자리다."

이렇게 긴 투쟁이 될 줄 몰랐단다. 자신들도 시민이고 세금내는 주민들인데 정부에서 설마 모른 척하랴...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시행사, 시공사, 관련 행정 부처는 서로에게 책임 떠넘기기 일쑤였고 살던 곳에서 그대로 살 수만 있게 해달라는, 말 그대로 가장 기본적인 생존권만이라도 보장해 달라는 그들의 요구는 쉽게 묻혀졌다.

 

  철거민들의 고독한 투쟁은 어디서나 이렇게 해서 시작되었다. 많은 것을 바란 것도 아니었다. 그저 살던 곳에서 살 수 있게 해주는 것. 아이들이 다니던 학교에 계속 다닐 수 있게 해주는 것. 그러나 그들을 바라보는 시선은 싸늘할 뿐 아니라 왜곡되어 있기까지 하다. 

  회원칼럼에 행신동 세투위 김혜자 회원을 첫번째로 소개하는것은 당연한 것인지 모른다.
지난 10월8일 민주노총 고양파주지부 회의실에서 파견법 철폐 켐페인 사전교양이 있는날, 어둠이 내리기전에 형광불간판과 네온이 길의 행신동 차도에 있는 천막을 찾아갔다.
  투망모양의 그늘막을 손으로 젖히고 허리 굽여 들어서니 천막이 반쯤 닫혀 내려져있어 다시한번 무릎을 구부린 자세호 천막을 열고 들어서니 형체가 보이지 않은 어둠속에서 어스무리 김혜자 회원이 일어서는 모양이 어슴프레 보인다. 고양시청 집회를 마치고 방금 누워서 쉬고 있었는지 갑작스런 방문에 매우 반갑게 맞아주었다. 몇차례 방안으로 들어와 편히 앉으라는 권유에도 불구하고 언뜻 쉬는 시간에 찾아온 것이 민망하였으나 스치로폴을 깔아놓은 바닥에 엉덩이를 걸치고 앉았다. 물과 전기 없이 사는 형편에 발에서 먼지라도 떨어질 것 같은 걱정이 들어서이기도 하고, 실은 아직 밖은 환하기에 안의 어둠이 눈에 익지 않아 선뜻 들어 앉지 못하기도 했다.
  약40분 대화를 하면서 수첩에 글씨가 보이지 않았지만 대강 단어 몇마디만 적으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행신동 세입자 투쟁은 우리 사회에서 가장 오래된 투쟁의 하나가 되고 있다. 당시 김혜자 가족은 보증금 1천만 원에 월 30만 원짜리 월세 집에 살고 있었다. 2002년 설명회를 하더니 투쟁이란 말조차 몰랐던 2003년 1월부터 철거민 투쟁에 연대하였으며 살던 집이 두 번, 콘테이너에서 한번,무허가 건물에서 한 번, 'SK뷰' 건설 공사가 시작되면서 살던 집에서 쫓겨났다.
  8년 가까운 세월을 투쟁하는 동안 대명종합건설과 고양경찰서, 고양시청, 덕양구청의 합동 탄압으로 행신동 철거민 가족은 수십차례 연행과 엄청난 액수의 벌금형 선고, 부부 동시 구속과 수차례 교대로 구속되는 등 시련을 당해왔다. 2006년부터는 한 가족 전체가 도로 옆 길바닥에 차량과 천막농성을 해왔다. 막내가 중학교 1학년이던 사춘기 때 본인이 구속재판을 받게 된 것이 마음 깊이 상처가 된 듯 반복하며 말한다.
  그당시 SK아파트 입주 전인데도 민원소지가 있다며 3년간 집회를 불허하였고, 연대 동지들과 기자회견을 한것을 연행 구속하였다. 투쟁을 포기하게 하기 위해 철거민은 현장사수가 목적인데도 주거가 불분명해 도주우려가 있다며 업무방해, 폭행으로 부부를 구속하여 재판을 받게하던 일은 사법사상 유일하지 않겠느냐며 지금도 당시 받은 가슴깊이 자리잡은 아픈 상처가 엿보인다.
  투쟁하는 철거민이기 전에 엄마이기에 그녀의 많은 이야기는 추위와 더위, 씻기와 공부,TV시청, 놀이를 하지 못하고 사는 아이들의 이야기가 많다. 부부가 구속되었던 아이들끼리만 차량에서 잠을 자면서 지냈다며, 그 충격으로 09년 5월13일 석방 후에 투쟁을 포기하려고 생각도 하면서 아이들과 회의를 하였다. 그러나 아이들이 오히려 끝까지 투쟁하자고 했고, 아이들이 원하지 않으면 더이상 못했을 것이란다.
  동절기 철거를 하지 않겠다던 한나라당의 정부 발표 다음날인 08년11월27일 기자회견 후 추운겨울 3인이 자면 꽉 차는 천막을 철거하였다. 아파트 입주가 시작되기 바로 전 즈음에 저들의 폭력적인 철거에 맞서서 연행되지 않기 위해 신나를 들고 차량위에 수차례 올라가기도 했다.  차안이 너무 추워 1회용 부탄가스로 천막을 데우며 손톱만한 고드름이 얼굴위로 떨어져서 잠을 제대로 잘 수 없던 겨울천막을 말하면서도, 그녀는 다가올 겨울을 걱정하는 말을 하지 않는다.
 

  지금은 주소가 변경되었지만 여전히 행신동 680-8번지 행주연립 가동 201호에 주소를 두고 16년간 살아왔으며 지금도 우편물을 받고 있다. 그런데도 공무원들이 '저 사람들은 무허가 건물에 살았기 때문에 세입자가 아니다"고 시장에게 보고해서 그렇게 알고 있다는 말을 들었다며 "한번만 확인해 보면 알 것이며 아이들이 어떻게 이곳에서 학교를 다녔겠느냐"고 8년동안 반복되는 권력기관의 치사한 행태에 잔뜩 화가 묻어있는 목소리로 말한다. 매일 아침 8시 출근시간에 맞추어 1인시위를 하기 위해 6시에 출발하여 집회 연대투쟁하고 시간이 나면 아이들을 챙기고 밤10시가 되어서야 천막으로 돌아온단다. 추운날에는 오가는 전철 안이 따뜻해서 좋았고, 공공건물의 화장실의 따뜻한 물을 이용할 수 있어서 좋았다고 한다.

  "인허가권을 내준 고양시청과 대명건설회사가 문닫지 않는 한 악귀같은 건설자본과 권력에 대해 투쟁하지 않을 수 없어요"

  어려운 투쟁과정을 들으며 공유하기에 속이 답답해지고 힘들어서 앞질러 내심 궁굼한했던 "꿈이 있다면 무엇이냐"고 물었다. "사람이 사람으로써 생각하며 기본적인 권리가 보장되는 세상에서 살고 싶다"고 대답한다. 나중에 재개발 문제의 전문가가 될터인데 정치를 하면 어떻겠냐고 또 물어 보았다. "빨리 끝내고 일상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 간절하지만, 그 후에 내가 아무렇지도 않은듯 살면서 뒤 돌아 설수 있을까? 하고 생각을 많이 해봅니다." 마지막으로 미소 지으며 하는말 "얼마전 10월1일 아들(중3)이 장미꽃 한송이와 '엄마 내년에는 더 좋은 선물 해드리겠으니 힘들게 헤쳐온 엄마 힘내서 이기자. 끝나고 행복하게 살자 투쟁!'이렇게 써 있는 편지지를 주었다며 그날이 본인 생일이였단다. 아마도 고등학생이 되면 아르바이트가 가능하니 돈을 벌면 더 좋은 선물을 사겠다는 것이란다. 다른 내용이기도 하고 같은 처지일 수 있는 예수가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집이 있으되 나는 머리 둘 곳이 없도다." 는 성경구절이 새삼 떠오른다.

  2000년이 지난 지금 여전히 이 가족은 도로 천막에서 오는 겨울과 버스정거장의 굉음과 위협을 내심 걱정하며 살고있다. 2010년 12월이 오기 전에 도로의 굉음과 차량돌진의 위협과 추위의 더없는 불편, 그 무서운 공포의 천막을 벗어나게 되길 기대해 본다.

  

고등학생 딸 아이의 교복이 걸린차를 견인해 가서 가방과 교복없이 학교에 갔다.

                                      (08년에  차량견인 주차장에서 찍은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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