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향신문 사설] ‘남일당의 기억’은 철거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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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일당’이 철거됐다. 지난해 1월20일 새벽, 서울 용산 남일당 건물 옥상의 망루 위로 한국 민주주의의 화형식과도 같은 화염이 치솟았다. “여기 사람이 있다”는 절규 위로 경찰의 폭력 진압이 전개됐다. 살아보겠다며, 제 땅에서 더 이상 유배되는 일은 없어야 한다던 철거민 5명은 주검으로 남일당 망루에서 내려왔다. 시민이 위임한 권력으로 시민을 불태워 죽이고도 1년이 다 되도록 냉동고 속의 주검들을 외면하던 정부의 비정함에 진저리를 쳐야 했던 게 불과 1년 전의 일이다. 우리 모두에게 과연 21세기를 살고 있는가를 자문하지 않을 수 없게 했던 ‘용산참사’, 그 야만을 망각할 수 없도록 버텨온 남일당 건물이 어제 우리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구속 철거민에 대한 대법원 판결이 나오자 검찰은 증거보존을 해제했고, G20 회의가 끝나자 재개발의 삽질이 재개되면서 남일당은 허물어졌다. 철거민의 생존권 요구를 권력으로 살해한 비극의 현장이자, 시민들이 모여 정의와 인권을 이야기하던 성지가 철거된 자리에 ‘용산 사람’을 내쫓는 고층 건물이 올라갈 터이다. 그러나 새 건물이 들어선다고 용산참사가 묻힐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야만의 진실은 규명되지 않았다. 은폐된 과거사는 반드시 진상규명의 절차를 거쳐야 한다. 역사에 생략이란 없다. 철거민을 죽음으로 내모는 살인적인 재개발·재건축의 제도 개선은 시간을 다투는 사안이다. 제2, 제3의 용산참사를 예고하는 갈등의 현장이 한두 곳이 아니다. 홍익대 인근의 두리반이 ‘작은 용산’이 된 지도 1년이 다 되어가고 있다. 세월이 기억을 침식할지언정 가난한 이들을 살던 곳에서 살 수 없게 만드는 재개발이 계속되는 한 용산참사는 망각될 수 없다. 남일당 건물은 철거됐어도 남일당의 기억은 철거될 수 없는 이유다.
용산참사 희생자 장례 때 유족 대표는 “너무 섣부른 재개발로 없는 사람들을 길거리로 내몰지 않았으면 합니다. 꼭 약속 지켜주세요”라고 당부했다. 우리는 그 당부를 기억해야 한다. 어떤 시인은 “남일당을 잊는 순간 당신의 삶이 철거당할 것”이라고 했고, 어떤 시인은 “우리가 내릴 역, 또 그 다음역은 언제나 용산참사역”이라고 했다. 역사는 구전(口傳)이라고 했다. 기록하고 기념물을 세운들 입에 오르지 않으면 역사가 되지 못한다는 뜻이다. 그래서 역사는 곧 기억이고, 그 기억을 입에 올리는 것이다. 역사가 오늘의 이야기일 수밖에 없는 건 그래서이다. 철거된 남일당을 역사로 만드는 것은 온전히 시민의 몫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