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헌정 목사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창세기 4: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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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에 보면 처음 인간인 아담과 하와는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는 명령을 어김으로 낙원인 에덴동산에서 쫓겨나게 되었고, 그때부터 인간 사회 속에는 죄악이 파도처럼 밀려들어오기 시작합니다. 선악과라는 말은 그 글자의 의미만을 본다면 이는 선과 악을 분별하는 도덕적인 판단력을 의미합니다만, 성서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그 이상의 것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악입니까? 부부가 함께 살아가는데 가끔 다툽니다. 같은 사실을 두고 자기는 옳고 상대방은 틀렸다고 주장합니다. 선과 악의 판단 기준이 사실은 자신에게 있습니다. 인간 개개인이 선악의 판단 기준이 된 것입니다. 이전까지 선악의 판단은 하느님께 있었는데 이것을 인간이 가로채어 버린 것입니다. 곧 선악과를 따먹었다는 말은 하느님 없는, 인간들이 저마다 모두 자기중심적인 이기적인 존재로 변했다는 말입니다.
그래 선악과를 따먹고 나서 가장 처음 생긴 일이 무엇입니까? 살인입니다. 그것도 원수들 사이에서 살인이 일어난 것이 아니라, 한 솥밥을 먹던 형제 사이에 살인이 일어납니다. 아담과 하와 사이에 가인과 아벨이라는 두 아들이 있었습니다. 형 가인은 땅을 가는 농부였고 동생 아벨은 양을 치는 목자였습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 아벨의 제사는 반기셨지만, 가인의 제사는 반기시지 않으셨습니다. 그것은 하느님께서 육식을 좋아하셨기 때문이 아니라, 가인의 삶이 바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자 시기심이 일어난 가인이 아벨에게 우리 함께 들로 나가 하루를 즐기자고 꾀어내어 돌로 쳐 죽입니다. 그러고는 그 시체를 땅 속에 묻어 버렸습니다. 증인도 없고 증거도 없습니다. 그러나 아벨의 억울한 피가 묻힌 땅이 하늘에 호소를 합니다. 이 피맺힌 한의 소리를 들은 하느님이 가인에게 묻습니다.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그러자 가인은 시치미를 딱 떼고 ‘제가 아우를 지키는 자입니까?’ 하고 묻습니다.
저 건물에서 경찰의 폭력으로 이상림님, 이성수님, 윤용현님, 양희성님, 한대성님이 억울하게 죽은지가 오늘로 123일이 되었습니다. 그런데도 장례를 치르지 못하고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이명박정권이 이 죽음에 대해 책임을 회피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이들을 지키는 자입니까?’ 하고 반문하고 있습니다. 하긴 이 정권은 부자들을 지키는 자들이지, 가난한 세입자들을 지키는 자들은 아닙니다. 지주와 재벌들의 재산을 보호하기 위해 힘없는 자와 가난한 자들의 생존의 권리는 외면하는 정권이니까 ‘우리가 저들을 지키는 자입니까?’ 하는 저들의 항변은 맞는 얘기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분명 경찰의 폭력에 의해 죽임을 당했지만, 경찰은 전연 시치미를 떼고 있습니다. 그리고는 분명한 증인도 있고 증거도 있는데 억지와 생떼를 부리고 있습니다.
검찰은 판사의 제출 명령에도 불구하고 3분지 일에 해당하는 수사 기록을 제출하지 않고 있습니다. 도대체 이게 말이나 되는 얘기입니까? 법을 얘기하고 정의를 찾는 검찰이 수사기록을 제출하지 않는다는 것이 말이 되는 얘기입니까? 민주주의 국가에서 있을 법한 얘기입니까? 이건 이 나라가 도둑놈들과 강도들의 집단임을 분명하게 보여주는 사실입니다. 하신 삼성 떡값을 처먹은 삼성 장학생들로부터 정의를 찾고 법을 찾는다는 것이 잘못된 일입니다. 이 나라의 대통령이라는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BBK 사건을 일으키고 아파트 투기를 위해 위장전입의 범지를 저지른 사람입니다. 도대체 아파트 투기를 위해 한번 두 번도 아니고 9번이나 위장전입을 했다는 것이 말이나 되는 얘기입니까?
그런데 그분이 하는 얘기를 들어보세요. 엊그제 대전에서 일어난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정당한 거리 투쟁을 두고 하는 말이 긴대나무로 경찰들과 대결하는 장면이 외신에 나와 창피하다고 말했습니다. 죽창이라고 말하는데, 이거야 말로 웃기는 얘기입니다. 죽창이면 찔러야지요. 뱃가죽을 찔러 들어가야 죽창이지요. 이건 그냥 만장으로 쓰던 긴대나무일 따름입니다. 그런데 이 정권은 이를 죽창이라고 합니다. 아니 차라리 이쑤시개를 갖고 죽창이라고 하면 제가 곧이 듣겠습니다. 그런데 이 긴대나무에는 창피를 느낀 양반이 1년 반전에 BBK 사건과 위장전입을 외신이 폭로한 사실에는 전연 창피를 느끼지 못하는 모양입니다. 그때 대통령 후보 시절 뭐라고 얘기했습니까? 광운전자 공대에서 수백 명의 학생들을 앞에 두고 강연한 동영상이 폭로가 되었습니다. 자기 것이 아니라고 우기던 BBK 회사가 자기 입으로 자기 것이라고 얘기한 동영상이 나오니까, 다급해서 하는 말이 재산 다 내놓겠다고 했습니다. 이 말이 벌써 부정직한 방식으로 번 돈임을 고백한 셈입니다. 그런데 청와대에 들어가더니 언제 그랬냐는 듯 입 닦아 버렸습니다. 아니 수백억원이 넘는 자기 재산 아까운 줄은 알면서 왜 수천만원이 전부인 가난한 사람들의 재산에 대해서는 아까운 줄 모른다는 말입니까?
청와대의 수장이 그러하니 그 밑에 있는 사람이 어떠하겠습니까? 그래 그렇고 그런 뒤가 구린 부자 각료들만 자기들 주위에 다 앉혀 놓고 겉으로는 경제니 개발이니 하면서 부자만 위하는 정책을 펴면서 헌법이 보장하고 있는 국민의 기본 권리인 집회와 결사와 언론의 자유를 짓밟고 있습니다. 이제 얼마 있지 않아 박정희유신정권이 저지른 것 마냥 종교 신앙의 자유마저 억압할 것입니다. 70년대 중앙정보부가 하던 교회 정치사찰이 이미 시작되었습니다. 지금 백성들의 한 맺힌 소리가 하늘을 찌르고 있습니다. 영구독재를 꿈꾸던 박정희가 순식간에 무너졌듯이 이 정권도 결코 오래가지 못합니다. 부정직한 정권, 가난한 사람들의 한 맺힌 소리를 짓밟는 정권은 하느님께서 결코 그만두지 아니할 것입니다. 우리의 입을 막으면 저 돌들이 소리를 칠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갈릴리라는 곳에서부터 하느님 나라 운동을 시작했습니다. 당시 갈릴리는 이스라엘 가장 변방에 있는 지역으로 가난하고 병든 사람들이 모여 살았습니다. 돈과 권력에 의해 희생당한 사람들이 모여 살았습니다. 그래 거기에는 항상 한의 소리가 울려 왔습니다. 그래 예수님께서는 수도 예루살렘 근처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셨지만, 그 한의 소리를 듣고 거기로 가신 것입니다.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고, 애통하는 자가 복이 있다고, 온유한 자가 복이 있다고, 평화를 위해 일하는 자가 복이 있다고, 정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이 복이 있다고, 하느님 나라에서는 바로 여러분들이 이 나라의 주인들이라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래 예수님 주위에는 당시 권력자들이 가장 싫어하는 사람들이 모여들었습니다. 어부들과 세리들과 몸을 파는 여인들과 병든 사람들이 모여들었습니다. 여러분! 지금 예수님께서 이 남한 땅에 오신다면 어디부터 가시겠습니까? 바로 이곳입니다. 용산 바로 이 철거의 현장, 죽음과 피의 한의 소리가 울려오는 이곳입니다. 그래 저도 예수님을 따라 이곳에 왔고, 3주전에는 저희 온 교우들이 이곳에서 평화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리고 예수께서는 수도 예루살렘에 가서는 ‘성전의 벽을 허물어라. 내가 사흘 만에 다시 짓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성전은 당시 권력의 상징이었습니다. 당시는 정치와 종교가 하나로 묶어져 있던 시대입니다. 그리고는 당시의 통치자 헤롯왕을 여우라고 불렀습니다.
이 헤롯왕은 예수가 태어났을 때, 동방박사로부터 유대인의 왕이 태어났다는 얘기를 듣고 베들레헴 근처의 2살 아래 남자아이를 다 죽인 폭군입니다. 마치 전두환 군사정권이 자신의 정권을 유지하기 위해 29년 전 수백명의 광주시민들을 학살한 일과 같습니다. 2천년 전 헤롯왕은 자신의 정권 유지를 위해서라면 무슨 일이든지 했습니다. 심지어는 자신의 아내도 죽였고 장모 그리고 세 아들을 죽였습니다. 그런데 그가 이런 살인만 저지른 것은 아닙니다. 그렇다면 그는 한낮 미치광이로 기억되겠지요. 그는 자신이 왕으로 있었던 치적을 남기기 위해 건설붐을 일으켜 엄청난 토목공사를 시작했습니다. 궁전과 부속건물을 짓고 사실은 성전도 그가 지었습니다. 그리고 그 팔레스타인 사막 예루살렘 고지대에 축구장만한 수영장까지 만들었습니다.
헤롯왕을 지금 이 나라의 이명박 대통령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이명박씨는 본래가 건설회사 사원에서 사장까지 오른 사람이고 서울 시장 당시 도시 재개발의 환상을 일으켰고 그 공로로 이제 대통령이 되어 4대강 정비라는 이름으로 한반도 전체에 토목공사를 일으키려고 하고 있습니다. 예수님 당시의 헤롯이라는 통치자가 한 짓과 같습니다. 한편으로는 자신의 정적들을 무참하게 살해하고 한 맺힌 가난한 민중들을 억압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자신의 불법과 비리를 감추기 위해 경제부흥과 국토건설이라는 명목으로 국민을 현혹한 것입니다. 그래 예수께서는 그를 간사한 동물인 여우에 비유한 것입니다. 우리는 이 여우에 현혹되지 마십시다.
지금 이 세상은 물질 탐욕의 시대가 되었고 많은 사람들이 돈의 노예가 되어 버렸습니다. 돈이 되는 일이라면 살인도 마다하지 않는 사회가 되고 말았습니다. 특히 이 남한 땅이 제일 그러합니다. 제가 세계의 많은 나라를 다닌 것은 아니지만, 잘 사는 나라 미국 일본을 비롯한 유럽의 여러 나라, 못사는 나라 네팔 인도 등 여러 곳을 다녀보았습니다. 그러나 이 남한 땅처럼 타락하고 욕망에 사로잡혀 사는 나라도 없습니다. 우리나라처럼 술집과 음식점과 모텔이 넘쳐나는 나라가 없습니다. 저는 교회가 명동에 있어 밤 늦게 명동거리를 지나가는 경우가 자주 있습니다. 그러면 술에 취해 비틀거리고 소리치고 싸우고 길에다 먹었던 것을 토하는 모습을 자주 봅니다. 외국 사람들도 술은 먹습니다. 그러나 서울과 같이 타락한 모습을 볼 수는 없습니다. 저는 우리 국민들이 이 용산의 희생에서 깨달음을 얻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전 우리 국민들이 이런 사실을 깨닫기를 바랍니다. 국민소득이 높아져야 잘 사는 나라라고 하는 착각에서 벗어나기를 바라고 돈으로 행복을 살 수 없음을 깨닫기를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분과 슬픔에 젖어 있는 유가족 여러분에게 부탁드립니다. 지금 제가 뭐라고 위로한들 여러분의 아픔을 치유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다만 한분의 가족 이야기를 통해 여러분이 위로받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1970년 11월 13일 점심시간에 당시 청계천 평화시장 광장에서 한 젊은이가 자신의 몸에 석유를 붓고 불을 댕겨 죽었습니다. 그곳에서 재단사로 일하던 22살의 젊은이 전태일열사입니다. 평화시장에서 일하던 노동자들의 권익을 위해 수년동안 노력하다가 그는 자신의 몸을 불태웠습니다. 그는 죽어가면서 어머니 이소선 여사에게 ‘자신의 죽음을 헛되이 하지 말아 달라’고 부탁을 하였고 어머니는 ‘그렇게 하겠다’고 약속했습니다. 그 이후 이소선 여사는 비록 가난한 사람이었고 배우지 못한 사람이었지만, 아들을 대신하여 가난한 사람들의 아픔이 있는 곳에 언제나 함께 하며 함께 투쟁했습니다. 그래 지금은 수백만의 노동자는 물론 생각 있는 지식인들 가운데 노동자의 어머니인 이소선 여사를 모르는 사람은 없습니다.
여러분은 사랑하는 남편과 아버지와 오빠와 형과 동생을 잃었습니다. 부디 바라기는 이 슬픔을 딛고 이 땅의 평화와 정의를 위해 힘써 일해주시기를 바랍니다. 가난하고 한 많은 사람들의 친구가 되어주시기를 바랍니다. 그길 만이 먼저 가신 분들의 죽음을 헛되이 하지 않는 일이고 여러분의 슬픔을 치유하는 길입니다. 하느님의 위로와 평화가 오늘 예배에 참여하신 모든 분들에게 함께 하시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