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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이 어딘가에 살아있는 것 같아 문소리만 들려도…"

작성일
2010.11.08 11:50: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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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원문 : 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60101104030001

"남편이 어딘가에 살아있는 것 같아 문소리만 들려도…"

[상처, 그후] '껌딱지' 군대 보낸 용산 참사 유가족 유영숙 씨

 

기사입력 2010-11-05 오전 8:13:21

서울 용산 재개발 4구역. 2009년 1월 '용산 참사'가 일어난 남일당 건물. 사건이 발생한지 2년 가까이 세월이 흘렀고, 우여곡절 끝에 장례를 치른지도 10개월이 지났다. 금방이라도 철거될 것 같았던 그 건물은 그대로 서 있다. 벽면에는 사건 당시 그을림이 여전히 남아 있고, 3~4층의 깨진 유리창들은 천으로 가려진 채 바람에 날리고 있다.

6명의 목숨을 앗아가고도 이 건물이 아직까지 멀쩡한 것은 재개발을 인가받은 조합원 중 4명이 조합을 상대로 제기한 관리처분계획 무효확인 등 청구소송을 냈기 때문이다. 게다가 서울고등법원은 3일 1심을 뒤집고 용산 4구역 재개발이 무효라는 판결을 내렸다. 이로 인해 용산 4구역 재개발 사업은 앞으로도 진행되기 어려울 전망이다. 대법원 판단에 따라 재개발 자체가 무산될 수도 있다.

용산 참사 고(故) 윤용헌 씨 부인 유영숙 씨는 "이럴거면서 왜 그렇게 급히 철거를 하고 사람들을 쫓아냈는지 모르겠다"고 원통해 했다. 그렇게 급하게 재개발만 추진하지 않았다면 남편의 목숨도 그렇게 사라지진 않았을 거라는 생각이었다.

▲ 2010년 11월 4일 남일당 풍경. ⓒ프레시안(최형락)

대견한 '껌딱지' 아들, 군대에

3일 서울 서대문구 모 커피전문점에서 만난 유 씨는 인터뷰 도중에도 남편 생각에, 그리고 아들 생각에 눈물을 글썽였다. 유 씨는 인터뷰 전날 장남을 군대에 보냈다. 둘이 딱 붙어 떨어지지 않는다고 해서 붙은 별명이 '껌딱지'였다. 그런 아들을 떠나보내야 하는 심정은 오죽하랴.

"의정부로 아들을 태워 가는데, 가슴이 먹먹하더라구요. 아이 아빠가 있었으면 좀 더 위안이 됐을 텐데 하는 아쉬움도 컸어요. 아이 아빠가 원망스럽기도 했죠. 아이를 위해 직접 운전해서 데려다 주고 싶었지만 돌아오는 길에 제대로 운전을 할 수 있을까 걱정돼 그냥 친척 차로 데려다 줬어요. 이럴 때 남편이 있었다면…."

유 씨는 아이를 보내고 펑펑 울었다. 남편을 잃고 의지하던 친구 같은 아들이라 상실감은 더욱 컸다. 유 씨는 "군대로 들어가면서도 내가 걱정이 됐는지 올해 수능을 보는 동생에게 '꼭 서울에 있는 대학교에 가서 어머니 잘 돌보라'는 말을 남겼다"며 "그 말을 듣고 있노라니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고 말했다.

"남편이 아직도 살아 있는 거 같아요"

▲ 유영숙 씨. ⓒ프레시안(최형락)
서대문구 경기대 쪽으로 이사한 유 씨는 아직도 남편이 가게에서 퇴근하는 시간만 되면 남편을 기다리게 된다고 했다. 유 씨는 "아직도 남편이 어딘가에서 살아있을 거 같다는 생각이 든다"며 "밤에 문소리가 들리기라도 하면 헐레벌떡 달려고 문을 열고 누가 왔나 확인하는 게 이젠 버릇이 됐다"고 말했다.

그래서 가끔 남편 영전 사진을 앞에 두고 이런 저런 이야기도 늘어놓는 유 씨였다. 그런 모습을 지켜보노라면 유 씨 아이들은 가슴이 먹먹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항상 유 씨에게 그러지 말라고 당부한다. 아이들 앞에서 약한 모습을 보이기 싫어 몰래 남편 영정 사진을 보며 눈물을 훔치지만 번번이 아이들이 눈치를 챈다.

처음 남편이 재개발 지역에 연대를 한다며 돌아다닐 때는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다. 자신의 가게 역시 재개발로 인해 없어지게 될 판국이었기에 한 사람이라도 더 많은 연대가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남편은 성격상 한 번 퍼주면 한도 끝도 없이 퍼주는지라, 종국엔 자기 가게는 신경도 안 쓰고 매일 이곳저곳 재개발 지역에 도움을 주기 위해 돌아다녔다. 결국 유 씨도 남편의 활동을 반대했다. 자신의 가게도 제대로 지키기 못하면서 무슨 남의 지역까지 신경 쓰느냐는 것. 결국 남편은 용산만 다녀오고 대외활동을 그만두겠다며 망루에 올랐다. 그게 마지막이었다.

"살림만 해서 몰랐어요. 왜 남편이 밖으로 돌아다녔는지 말이죠. 하지만 용산 참사 이후 다른 곳 사람들을 접하면서 '이런 세상도 있었구나' 하는 생각을 했어요. 안 할 수가 없는 거죠. 이렇게 억울한 사람들이 많다니 말이죠. 남편에게 미안했어요."

"남편의 억울한 죽음 밝혀내고 싶어요"

올해 1월, 남편의 장례식을 치렀다. 정운찬 국무총리의 사과를 받아들인 결과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용산 참사 문제가 해결된 건 아니다. 아직까지 용산 참사 진상 규명, 고인의 명예회복 등은 하나도 진행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유 씨는 전국민족민주유가족협의회에 가입해 활동을 하고 있다. 또한 매주 금요일 4대강 반대 미사에도 참여하고 있다. 매달 마지막 주 수요일에는 용산 참사 진상규명 미사에 참여한다.

유 씨는 "내가 살아있는 동안에는 남편의 억울한 죽음을 밝혀내고 싶다"며 "아이들에게 아버지가 훌륭한 사람이었다는 걸 증명하고 싶다"고 지속적으로 여러 활동을 하는 이유를 설명했다.

용산 참사가 터진 후 1년 동안 문제 해결을 위해 병원, 남일당 건물 등에서 숙식을 해결했다. 단 하루도 상복을 입지 않은 날이 없었다. 지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다. 그럼에도 유 씨가 이렇게 사회에 대한 끈을 놓지 않는 건 함께 하는 시민들 때문이었다.

유 씨는 "미사에 나가면 시민들이 힘내라고 독려도 해준다"며 "그런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아무리 내가 지치고 힘이 든다 해도 계속 용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해야겠다는 생각을 한다"고 말했다.

ⓒ프레시안(최형락)

용산은 참사는 현재진행형

유 씨는 언젠가는 용산 참사에서 숨겨진 진실이 밝혀지리라 믿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자신이 이 문제를 포기하지 않았고 또한 함께 힘을 모아주는 주위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었다.

유 씨의 첫 째 아들은 지난 2월 이한열 기념사업회에서 특별 장학금도 받았다. 주위 사람들이 신경써주고 있다는 생각에 힘이 날 수밖에 없었다. 용산 범대위도 용산 진상규명위원회로 명칭을 변경해 다양한 활동을 하고 있다. 아직까지도 20여개 단체가 참석한 가운데 책자 발간, 북 콘서트 등을 진행하고 있다.

또한 용산 문제를 부각시키기 위해 재개발 문제, 강제집행법 개정과 관련한 토론회도 여러 차례 열었다. 지속적으로 투쟁을 하고 있는 철거민과 사회단체를 연결시켜주는 가교 역할도 준비 중이다. '용산 참사'는 아직까지 진행 중인 셈이다.

유 씨는 "적어도 아이들에게 떳떳한 아버지를 보여주기 위해 앞으로도 계속 노력할 것"이라며 "주위에서 도움을 주기 때문에 포기를 할 수 없다"고 말했다.
 

/허환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