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기소한다! 생생한 현장 목격자의 1인으로 용산학살을 이대로 묻을 수 없다.
이명선(칼라TV 리포터)/ 글 윤미(인권운동사랑방)
지난 1월 20일 용산 참사가 일어난 이후, 이 문제에 관심을 가진 사람들이라면 한번쯤 보았을 영상이 있다. 바로 칼라TV의 영상이다. 그리고 누구나 기억할 것이다. “전철연 회원이 자신의 삶의 터전을 잃은 채 이번에는 목숨을 살려달라고 화마를 피해 옥상 왼쪽 건물 외벽에 붙어서 외치고 있습니다.” 카메라 옆에서 상황을 계속 중계하다 이내 울먹이던 그 목소리, 바로 칼라TV의 이명선 리포터다. 촛불집회 때도 매일매일 시민들 사이를 누비며 마이크를 들고 다니던 그 사람, 바로 이명선 리포터다. 용산국민법정을 위한 또 한 명의 기소인인 그녀를 만났다.
그녀는 2MB, 오세훈, 김석기, 박장규, 자본제일주의를 기소했다. “2009년 1월 19일과 20일, 칼라TV 이름으로, 생생한 현장 목격자의 1인으로 용산학살을 이대로 묻을 수 없다. 국민 법정의 증인으로 진실 규명을 위해” 라는 게 이유다. 1월 20일, 그녀는 바로 그 현장에 있었다. 사실 그 날의 기억에 대해 묻는 건 쉽지 않았다. 역시나 그녀는 떠올리고 싶지 않은 기억이라며 조심스레 말을 시작했다. “저는 저희 스텝진보다 늦게 갔어요. 지방에 있었는데 오라고 전화가 온 거예요. 원래 쉬는 날이었거든요. 오긴 왔는데 너무 아무 일이 없다고, 방송에서 리포터가 필요한 순간은 사건이 없을 때, 너무나 화면이 지루하니까 시간과 공간을 땜질할 사람이 필요할 때거든요. 수다 떨게 오라는 거예요. 그러면 철수하면 되지 그랬는데, 현장에 있는 사람 말로는 분명히 무슨 일이 일어날 것만 같은 불길한 느낌이 든대요. 알았다고 해서 19일 저녁 8시에 현장에 갔어요. 이미 제가 갔을 땐 밤이 되었지만 망루에 몇 명이 올라갔는지, 요구조건이 뭔지, 용산4구역 재개발 논란과 관련한 정보를 하나도 모르고 갔어요. 그때 밤 9시부터 마이크를 잡고 방송하기 시작하면서 그 이후부터 본격적으로 용역들이 불을 지르고 연기를 피워 올리면서 위협을 하더라고요. 다음 날 저녁 11시까지 생방을 하고 그 이후로 거의 매일 집회를 참여하면서 겨울을 보냈죠.”
최근 그녀는 많이 아팠다고 한다. 그 날의 후유증이 반년이 지나서야 찾아온 것이다.
“전 진압이 다 된 줄 알았어요. 이제 연행밖에 안 남은 상황이었어요. 저희도 연행자들을 중계하려고 카메라 위치를 현장 가까이로 옮겼어요. 그런데 옮긴 지 얼마 안 돼 건물 위에서 붉은 불꽃이 확 올라오는 거예요. 빨간 고무장갑이 낀 채로 등에 불이 붙어있던 용산참사 사진을 저는 눈으로 직접 봤어요. 영화 보는 것 같았어요. 사람이 불에 타죽었다는 걸 실감을 못했어요. 그걸 실감한지가 사실 얼마 되지 않아요. 의식이 기억을 지배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던 게, 애써 그때 상황이 어땠는지를 스스로 안 떠올린 거예요. 방송을 통해서나 집회현장에서 유가족들을 봤을 때만 스파크처럼 팡팡 그때 생각이 났어요. 제가 이번 여름에 근육경련이 일어나서 2개월 정도를 집에서 꼼짝도 못 하고 누워있었거든요. 6월 20일 집회 이후였어요. 남일당 건물에서 용산 집회가 있었는데 그날 유가족들 오열하는 거 보고 같이 눈물 흘리다가 어머니들 절규하는 거보고 연행되는 거 막겠다고 같이 앉아있었거든요. 심장이 약한 유가족 분 가슴에 손 얹으면서 물 달라고 요청하고, 방송을 해야 한다는 본연의 임무를 잊었죠. 그 집회를 겪은 다음에 유독 힘들었어요. 아침에 사무실 오려고 일어나는데 목이 약간 돌아간 상태로 제 몸이 통제가 안 되는 거예요, 감정이 너무 격했던 것 같아요. 사건발생 이후 거의 매일을 그곳에 갔는데 6개월이 지나면서 현실적으로 인식되는 거예요. 그제서야 ‘아, 내가 불에 타 죽은 사람을 봤구나. 그 사람이 지금 열사 다섯 사람 중 한 사람이었을 수도 있겠구나’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생각하지 않으려고 묻어뒀던 기억이 판도라 상자처럼 드러나는데, 스파클 같은 기억이 6개월 동안 반복되다가 합체가 된 것 같았어요. 아무리 의식이 기억을 누르고 지배해도 현실 공간에서 일어난 일들이 끝까지 감춰지진 않는구나. 분명 감추려고 애쓰는 쪽이 있지만, 이들조차도 언젠가는 자신이 알지 못 하는 상태에서 수면 위로 떠오르는 진실이 있겠구나 싶더라고요.”
이명선 리포터의 눈이 그렁그렁해졌다. 나는 처음 칼라TV의 용산참사 영상을 본 이후 다시는 보지 않았다. 한 없이 우울해지는 감정을 감당하지 못 할 것 같아서였다. 그런데 그녀는 그 현장에 있었고 두 눈으로 보았다. 그리고 현장 중계를 위해 매일 그 곳으로 갔다. 설마설마 하며 애써 믿지 않으려 했던 그 기억이 지금까지 그녀를 계속 아프게 했고 몸이 먼저 그걸 드러낸 것이었다. 그래도 그녀는 아픈 이후로 오히려 마음은 안정됐다고 한다. 그래서 그 사건에 대해 제대로 말할 수 있게 됐다. 최근엔 법정에 증인으로도 출석했다.
“제가 이번에 증언한 건, 테러리스트들이라고 공격하면서 저쪽에서 말하는 위협적인 상황이 전혀 아니었고 시민들의 안전을 해치지도 않았고 오히려 용역이 주가 돼서 도발했고 경찰은 방관했고 소방관조차 묵과했고, 소방관들이 묵과한 불씨 때문에 화재참사가 났다고는 입증할 수 없지만 발생 전부터 불씨를 둘러싼 싸움이 계속 있었다는 것, 화염병이 던져지긴 했지만 그걸로 인해서 일반시민의 통행을 방해한 일은 없었고 오히려 경찰과 용역이 망루 위로 올라간 사람을 위협하지 않았더라면 화염병이 투척될 일은 없었다는 걸 전했죠.”
태어나서 처음 간 법정이었다. 법정에 들어가서 그녀가 처음 본 모습은 죄수복을 입은 전철연 회원들이었다.
“법정에 들어갈 때 왼쪽의 검사들에게는 차마 시선이 안 가고 제 눈에 보였던 건 죄수복을 입고 있는 예닐곱 명의 전철연 회원들이었어요. 그런데 그 얼굴들이 다 다르게 생겼을 거 아니에요? 그런데 다 똑같이 보이는 거예요. 정확히 수도 헤아려지지 않고 죄수복을 입고 있다는 것 자체가 사람을 구별하지도 못하게끔 하는구나 싶고. 제가 사람 얼굴을 잘 기억하는 편이거든요. 그런데 전혀 얼굴이 기억나지 않았어요.”
“검찰 쪽 심문에서 여자 검사가 첫 질문의 운을 뗐거든요. 그런데 사건의 진상을 규명하기 위해서 나온 사람들이 아니라 일방적으로 누군가를 매도하기 위해서 나온 사람이라는 느낌이 들었어요. 굉장히 신경질적인 목소리, 그네들의 시선들에서 저들은 사실이 아닌 정황만으로 이 사건을 은폐하려 하는구나 하는 확신이 생겼어요. 내가 무슨 정의의 사도는 아니지만, 내가 지금 이곳에 앉아서 진술하고 있는 일련의 과정들이 옳은 일이구나 라는 확신이 생겼고 그때서야 마음의 여유가 생겨서 주위를 돌아봤어요. 그런데 유가족들이 그대로 다 앉아있는 거예요. 여전히 유가족들 얼굴 보면... 괴로워요. 처음 겨울에 발생한 일이었기 때문에 두꺼운 상복이 얇은 모시적삼이 되었다가 다시 두꺼워지면 6개월 전 내 남편과 아들을 잃었을 때 입었던 그 상복을 다시 꺼내 입어야 하는 거잖아요. 살아남은 자들, 아직까지 장례를 치르지 못 한 살아남은 자들의 한으로 영원히 남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마지막으로 나는 또 한번 조심스러운 질문을 꺼냈다. 수없이 현장을 다니면서, 사실 무력해지진 않느냐고, 촛불도 그랬고 현재 용산도 그렇고, 바뀌는 것 없이 해결되는 것 없이 시간만 흘러가는 이 상황이 답답해서 무력해지진 않느냐고. 그녀는 ‘맞다’고 했다. 하지만 이렇게 덧붙였다.
“되게 힘 빠져요. 근데 그만큼 힘 빠지는 만큼 내가 잃었다는 느낌보다 무력해진만큼 다시 세상을 알아가는 생각이 들어요. 무력감이 들수록 공허해져야 하는데, 무력감이 증폭될수록 세상을 알아가는 것 같아요. 무력한 공간에 내가 겪은 세상이 들어가는 것 같아요. 무력하죠. 일제고사 관련해서 해임당한 선생님들 보면 교단에 서지 못 하고, 그런데 더 큰 규모로 일제고사가 시행되고 이제 반발은 줄어 들 테고, 그대로 시행이 되겠지만 그래도 선생님들 얼굴을 보고 싶어서 나오는 거예요.”
그녀는 영락없는 현장의 사람이었고, 열정적이고 눈물도 많은 사람이었다. 사실, 상식적이지 않는 일이 일어나는 이 세상에서 어떻게든 냉정하고 중립적인 보도를 해야 한다는 믿음은 그저 기계적인 중립성일 뿐이라는 생각이 든다. 오히려 그런 믿음이 진실을 은폐하고 있는 건 아닐까? 그래서인지 용산 현장엘 가면 늘 울지 않으려고 하지만 결국 또 울어버리고 만다는 그녀의 말에, 그 마음으로 오늘도 현장으로 달려가고 지켜보고 말을 건네는 그녀의 일이 무척이나 진실해 보였다.
“사실 제가 가수용상가를 만들어줄 수 있는 힘이 있겠습니까, 재개발법을 고칠 수 있는 현실적 능력이 있는 것도 아니고,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현장에서 악에 바쳐서 소리 지르는 분을 그대로 카메라로 비추고 현장에서의 상황을 전하는 것밖에 없는데. 죄책감은 아닌데 계속 감정이 교차되는 거죠. 유가족들 안으로 들어갔다가, 마이크를 잡고 있기 때문에 기자로서 사건에 대한 정확성을 알려야하겠다는 것 사이에서 눈물이 나왔다 들어갔다 해요. 결국 9월 23일 서울역에 있었던 추모대회에서는 어머니들 모습 보면서 한 쪽에서 울고 있었어요. 이젠 어머니들이 제가 잘 우는 겁쟁이란 걸 알아서 오히려 절 위로해주시더라고요. 선배가 홈페이지에 제가 위로받는 사진을 올리면서 ‘용산에서 위로받는 우리들’이란 글로 올렸는데, 6개월이 지나서 불에 타서 사람이 죽었다는 인식이 생긴 이후에는 오히려 제가 위로받는 것 같아요.”